연못 위 누마루에 올라 달 벗삼아 풍류 즐기니 무릉도원이 예일까…

▲ 조선 순조 때의 관료 겸 학자인 귀애 조극승의 호를 따 지은 귀애정. 아름다운 연못과 누마루가 어우러져 빼어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귀애정은 영천시 화남면 귀호1리에 있다. 대구포항고속도로 북포항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청송방면으로 가다가 화남면사무소 앞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가야 한다. 그런 뒤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서면 작은 네거리가 나오는데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귀애고택이 있고, 고택의 뒤편에 귀애정이 있다.

첩첩산중에 터를 잡고 세거지를 연 이는 조명직이다. 산림처사로 영천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던 조명직은 풍수지리에 능했다고 한다. 영천 금호읍 창수마을 창녕조씨 세거지에 살던 그는 좋은 집터와 묘터를 구하기 위해 영천 일대 산천을 샅샅이 찾아다닌 끝에 영조 43년(1767년) 귀호리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귀애고택 안채 뜰에서 보면 앞산과 앞산 사이로 보현산 정상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봉우리 이름이 붓의 끝을 닮았다고 해서 필봉이다. 풍수에 필봉이 보이는 곳에 집터를 잡으면 후손 중 3대 후손 이내에 과거 급제자가 나온다고 한다. 게다가 귀애고택은 집터 앞에 바위가 반도처럼 내려와 있고 마당 중간에 산자락이 발을 뻗치듯 내려와 있어 전형적인 '소쿠리' 형태의 터다. 소쿠리는 곡식을 담고 모으는 기능을 하니 소쿠리터에다 집을 지으면 재물이 모인다고 한다. 벼슬에 재물운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의 명당이다.

조명직의 예언은 적중했다. 증손자인 귀애 조극승·규승 형제가 조선 순조때 나란히 문과에 급제했다. 극승은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돈령부 도정을 역임하고 공조참의를 제수 받았다. 정3품 당상관이다. 규승은 사간원 지평과 정원 벼슬을 했다. 귀애정은 조극승이 죽자 후손이 그의 호를 따 지은 정자다. 조극승의 호 귀애는 '거북이가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귀애 고택으로 들어오는 다리 옆 언덕에 신석기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2기가 있는 데 앞의 큰 고인돌은 남자, 뒤에 작은 고인돌은 여자의 무덤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 고인돌이 거북이를 닮았고 거북이가 귀애고택으로 기어들어오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고인돌 근처에 10여 개의 커다란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을 호수로 여겨 거북이와 호수가 있는 마을, '귀호리'라 불렀다. 조극승은 거북이가 언덕위에 있는 터에서 태어났다며 자신의 호를 '귀애'로 지었다.

조극승은 공조참의를 끝으로 귀호리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동생 규승과 함께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대학강론'을 저술해 후학들에게 맞춤형 강의를 했고 문집으로 '귀애집'을 남겼다.

▲ 연못 위 누마루에서 바라본 귀애정 전경.
조극승은 행운아였다. 증조부의 풍수 덕을 보았는지 벼슬살이는 당상관까지 올랐고 퇴후지지를 고향으로 택해 시를 읊고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만년을 행복하게 보냈다. 열복(熱福)을 누렸던 이는 청복(淸福)을 누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는 열복과 청복을 모두 누렸다. 열복이란 높은 벼슬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이란 깊은 산속에 살며 맑은 물에 발 담그고 산승이나 우객과 왕래하며 소요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사는 삶이다.

정자는 조극승이 후학을 가르치는 장소에 세워졌다. 1915년 또는 1916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자는 두칸 온돌방, 한칸 마루방, 한칸 온돌방 형태를 기본구조로 한 뒤 한칸 온돌방 앞에 누마루를 돌출시켜 'ㄱ'자를 눕혀놓은 모양으로 지었다. 정자 앞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을 조성하고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든 뒤 육각형 정자를 세웠고  정자와 섬을 나무다리로 연결해 운치를 더했다.  정자 앞에는 길이 1m, 높이 50~60㎝ 정도의 돌거북이 정자를 바라보고 있다.

귀애정 현판은 산림처사로 지내면서 글이 뛰어났다는 김여락이 썼고, 수월루는 이조판서를 지낸 조선후기 명필로 꼽히는 조석여가 썼다. 몽희헌은 이조참판을 지낸 조선후기 명필 조석원이 썼다. 조석여와 조석원은 6촌형제다.

누마루는 '수월루(水月樓)'라 이름지었다. 누마루에서 연못 위에 비친 달을 보는 재미가 솔솔했던 모양이다. 옛어른들은 '꽃피는 아침과 달 뜨는 저녁(花朝月夕)'을 경치가 가장 좋을 때라 하였고, 그 경치를 보며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하는 '음풍농월'을 최고의 풍류로 알았다. 정극인은 상춘곡에서 '청풍명월말고 무슨 벗이 또 있을고'라며 달과 노니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다. 달을 벗삼아 노닐며 '심월상조'하는 달관의 세계가 수월루 현판에 담겨 있다.

조극승은 벼슬을 마치고 고향에 고향마을의 10가지 절경을 읆은 '귀애 십영'을 남겼는데 그 중에 달과 관련된 시가 첫 수에 나온다. '동쪽 산마루에 달을 맞다'이다.


▲ 담벼락 옆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숲속에 묻혀 있는 한 채의 옛집에서

태연한 마음으로 이몸이 늙어가니

때때로 동쪽 언덕 위에 찾아오는 밝은 달빛

천년토록 변함없이 맑은 정신 간직했네


방 앞의 툇마루는 '몽희헌(夢喜軒)'이다. '꿈속에서 기뻐하다'는 뜻이다. 장자의 호접몽이 연상된다. 어느 날 장자는 제자를 불러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버렸더니 나는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까 꿈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놀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도연명의 '도화원기'도 무릉도원에서 즐겁게 놀다온 꿈같은 이야기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니 기쁘게 즐기다가 가자는 도가적 풍류를 담은 현판이 '몽희헌'이 아닌가.

조선시대의 선비가 고향으로 돌아와 시를 짓는데 도연명을 빼놓을 수 없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며 아득한 남산을 본다'는 도연명 풍의 시를 '귀애 십영'에 남겼다. '울타리 아래 서리맞은 국화'라는 시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울밑에 서리맞은 국화

온산에 가득한 단풍잎 사이사이

갑자기 입게 된 조화옹의 사랑이라

밝은 향기 담백함을 스르로 간직하니

그 마음 알아줄 때 묻노니 그때가 언제인고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