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동경관 건물 노후상태 주변공터는 경작지로 사용 타 도시보다 자료수집 미흡

▲ 경주동경관 모습.
▲ 조선통신사절단의 일본 첫 숙소.
▲ 조선통신사절단의 일본 첫 상륙기념비.
경주 동경관(東京館)은 조선시대 VIP의 숙소다.

동경관은 조선시대 주요 손님들의 공식 숙소로, 현재 경주 경찰서 건너편에 남아있다.

최초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충숙왕 때 소실·중수되었고, 조선 정조 10년(1786) 재건축 될 때 정면 5칸, 측면 3칸의 3동(대청, 동헌, 서헌) 연결 건물로 모두 45칸이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 경주 공립보통학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사용하다가, 경주교육청 건립으로 2동은 철거되고 1동(서헌)만 이전돼 현재 '경주 문화원'에서 전통문화교육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통신사절단의 일본 파견은 조·일(朝日) 상호 우호증진을 위해, 임진왜란 이후 1607년부터 200여 년간 총12회에 걸쳐 시행되었다.

삼사(三使)를 지휘부로 400~500명으로 구성된 많은 인력과 가축·부속물이 한양에서 부산까지 이동되는 만큼 그 행렬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사절단 행로가 한양→ 판교→용인→죽산→충주→문경→예천→안동→의성을 거쳐 영천→경주→울산→동래→부산으로 이어지면서, 경주는 신라 천년 도읍과 경주읍성 등 역사 유구한 대읍으로서 사행명분이 충분한 핵심코스였다.

특히 동경관은 이들의 숙소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수십 칸의 숙박능력뿐 아니라 이곳이 신라 패망 이후 고려로 이어지면서 중요 주방집기류의 보관 장소여서 취사준비에도 유리했으리라 추정된다.

영조39년(1763) 11회째 사절단 정사 '조엄'은 "저녁 경주에 들어가니 사또 이해중이 안동시관이 되어 고을에 있지 않음으로 섭섭했다"라는 서운함을 일기로 남겼지만 지금의 동경관은 낡고 초라한 집 한 채뿐, 관련 흔적이나 자료는 아무것도 없다.

지난 4월 일본 규수여행 때 시모노세끼에 있는 조선 통신사의 일본 첫 상륙기념비와 당시 그들의 숙소를 찾아봤다.

기념비는 한국 포천산(産) 돌비석에 한자로 '朝鮮通信使 上陸 淹留之地(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라고, 당시 한·일의원연맹회장 김종필씨가 2001년 8월 25일에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측에는 기념비 건립 취지문이 적혀있고, 주변에는 녹지공간과 의자들이 놓여있어 쉼터로 적당하다. 바닷물이 찰랑대는 해변가 '간몬교'가 바라다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비 맞은편 길 건너 언덕배기에는 사절단의 첫 일본지역 숙소로 매회 묶었던 유서 깊은 '아카마신궁'이 있다. 죽은 일왕을 기리기 위해 수백 년 전에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 숙종 때 승지요, 8회째(1711) 부사였던 '임수간'이 쓴 친필이 일본 중요 문화재로 보관되어 있다. 12세기 일본의 두 족벌 전투 중 패전으로 자살한 어린 일왕 '안토구'를 추모하는 시문(詩文)이다. 사절단의 숙소였던 이 신궁 주변에는 이렇듯 우리 문필가들의 빼어난 필력들이 남아있어 조선 문인의 위상을 널리 빛내고 있었다.

경주 동경관 건물은 노후상태며, 주변공터는 고추·마늘밭 등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다. 부산에는 '조선통신사 역사관'이 있어 관련역사 기록들이 보관·전시돼있으나, 경주에는 타 도시에 비해 이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관심이 미흡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객관 주변을 손질하여 동경관이나 조선통신사절단의 관련자료 그리고 기타 조선시대 경주 역사자료 등을 종합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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