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아픔, 끝없는 허전함 몸으로, 바닥까지 그려내야 '진정한 삶' 요목 인정받아

최근 서점가에 보기 드문 '장이 섰다'는 소식입니다. 소설가 한강씨가 외국에서 큰 상을 받은 결과랍니다. '한강이 누구지?'라고 묻던 독자들이 줄을 서서 그의 소설책을 삽니다. 책은 많고 독자들의 불신의 장벽은 높습니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이 책이 좋은 책이다'라고 지목을 해주면 독자들의 마음은 한결 가볍습니다. 유행(流行)은 패션(passion)입니다. 정열입니다. 모두가 함께 미친 듯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동일한 행위에 동참하면서 식어버린 내 인생의 체감 온도를 올립니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갑니다.

십여년 전에 한강씨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 선생이 대구에 온 적이 있습니다. 대구시가 주최한 큰 규모의 문학제 행사에 소설 섹션의 발표자로 참석했습니다. 사회를 보면서 저는 한승원이라는 소설가는 한국의 헤밍웨이로 불릴만하다고 했습니다. 헤밍웨이와 한승원은 문학과 인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살아있는 화석'들입니다. 전라남도 장흥에 가면 '좌승원 우청준'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장흥으로 들어가면서 좌측(안양면 사촌리)으로는 한승원 문학의 현장이, 우측(회진면 진목리)으로는 이청준 문학의 모태가 펼쳐집니다. 한 분은 생존해 계시고 한 분은 돌아가셨습니다.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만, 두 분 모두 한국 소설의 여전한 두 금자탑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소설은 늘 특수한 한 인생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야 보편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의 역설입니다. 문학이 점잔을 빼고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로 모든 것을 관통함)를 목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죽습니다. 생각을 많이 해서 머리가 커지면 문학은 죽습니다. 절실한 아픔, 끝낼 수 없는 허전함을 몸으로, 바닥까지 그려내야 시도 되고 소설도 됩니다.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시인이고 소설가입니다. 제가 한강씨의 아버지 한승원 선생을 한국의 헤밍웨이라고 지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소설가 한승원은 그나제나 여전히 '짐진 자'입니다. 십여년 전의 그 문학제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패널로 참석했던 한 저명한 평론가가 한 선생의 작품을 두고 그 '한계와 극복'을 논했습니다. 그때 소설가가 보인 분노가 아주 격렬했습니다. 마치 '니들이 게 맛을 알아?'와 같은 어조로 평론가를 마구 질책했습니다. 말로, 생각으로, 겉멋으로, 문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만석해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순자는 논도(論道)의 대립 개념으로 소가진설(小家珍說)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두고 추구하는 내용과 형식을 잘 요약한 말입니다. 서양의 경우 소(小)가 보통 짧은 것, 단일한 것을 뜻하는데 비해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 '큰 소용이 못 되는 것'이었습니다(조남현·'소설원론'). 문학은 그런 가치 없고 소용이 못 되는 것을 써서 삶의 큰 원동력을 찾아냅니다. 자체로 반어고 역설입니다. 이번 한강씨의 쾌거도 그러한 문학의 존재 근거를 잘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집안의 소가진설이 세계적으로 '진정한 삶'의 요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정치가 천박하고, 경제가 무지해도 우리나라가 막장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한 시골 출신 부녀 소설가의 '승리'를 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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