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 이웃·자손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

집 이야기, 혹은 당호 이야기 중에서는 '유재(留齋)'가 단연 압권입니다. 제주에 유배 가 있던 추사가 당호를 청하는 제자 남병길에게 그렇게 지어준 것이랍니다. 현판에 새겨서 보낸 것인데 도중에 바다에 빠트린 것을 일본까지 가서 다시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巧 以還造化·유부진지교 이환조화)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祿 以還朝廷·유부진지록 이환조정)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留不盡之財 以還百姓·유부진지재 이환백성)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留不盡之福 以還子孫·유부진지복 이환자손)' (유홍준, '완당평전2', 학고재, 435쪽)

언젠가 신문에서 본 '인생은 낯선 여인숙의 하룻밤과 같다'라는 마더 테레사의 임종 때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와 함께 '유재(留齋)'에서 강조하고 있는 '남김을 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사는 것은 언제나 낯선 것이지요. 누구에게나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 '낯선 것'을 따뜻한 정으로 감싸는 것이 바로 '남김을 두는 일'일 겁니다. 큰 재주(복)를 타고 났던 김정희 선생은 자연을 크게 거스르지 말고 이웃과 자손들을 제 몸보다 귀히 여기라고 당부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나라 안팎으로, 자기 복을 남김없이 다 쓰다가 어쩔 수 없이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이들을 다수 보게 됩니다.

혹자는 남의 실력을 빌려서 돈과 명예를 쉽게 얻다가 일거에 망하기도 하고, 혹자는 전관(前官)의 위세로 밤낮으로 부(富)를 축적하다가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기기도 합니다. 나라 밖 어느 재벌은 7조원의 재산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죽기 전에 그는 작은 가게나 하나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 자기 복을 남김없이 쓰다가 당한 횡액(橫厄)들이라 할 것입니다.

육십 평생을 살아 오면서 저는 단 한 번도 '남김을 둔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등바등, 내 기교와 재물과 복을 한 자리에 모은 단란한 울타리 안에서 일생을 내 가족 보살피는 일에 몰두해 왔습니다. 다행히 큰 실패도 없었고, 자식들도 제 몫을 다해주고 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는 가족 문제로 '풍요 속의 빈곤'을 겪는 이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는 은근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일면도 있어 제 노년의 삶이 외롭지만은 않습니다. 어쨌든, 이제 그 동안의 인생을 정리하고 제2의 출발을 기약하는 노년의 초입에서 문득 추사의 '유재(留齋)'가 제 심금을 울리는 것도 우연은 아닐 듯 싶습니다. 미관말직, 천학비재의 처지로 타고난 복이라는 게 과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만 하나는 알겠습니다. 남기고 말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대선(大選)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복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분들과 추종자들에게 추사의 '유재'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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