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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스토리] 장애인의 날 '대구시장상' 공예디자이너 천미정씨

"학생·아내·어머니·노점상 1인 4역에도 힘든줄 몰랐어요"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6월01일 21시37분  
▲ 태어날 때부터 아픈 딸을 잘 키워 장애인의 날 대구시장상을 받은 천미정씨.
"원망하고 바뀐다면 계속 원망만 했겠지만, 마음을 비우니 더 가벼워졌어요."

지금은 덜하지만 대한민국 여성의 삶은 대부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불린다. 자신을 수식하는 의미는 사라지고 둘러싸인 상황이 자신을 규정하기 마련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픈 딸을 잘 키우면서 장애인의 날 대구시장상을 받은 천미정(55·여)씨도 표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고 그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수공예 엔틱장신구를 만드는 공예디자이너이자 문인화가다.

인생 자체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헤어진 후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은 살았고 그 속에서 감사하는 법과 긍정적인 삶을 배웠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천미정 씨를 지난달 31일 대구본부에서 만났다.

상을 받기 전부터 천 씨는 지역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인사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작품을 팔고 만들면서도 작품 자체가 아닌 자신의 인생에서 느낄수 있는 편안함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거리 예술가다. 활발한 SNS 활동으로 수많은 팔로워와 함께 삶 자체를 공유하는 사람이며 작품을 구입하려 온 사람에게 잔소리 뿐 아니라 삶의 지혜까지 듬뿍 나눠준다.

당연히 그가 운영하는 노점은 꾸준히 손님을 넘어 정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최근 장애인의 날 관련 상을 받으면서 천 씨는 더욱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히 모든 것을 집중해 봉사활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쉬는 날 딸이 다니는 기관에 재능 기부를 다니고 주변 예술인의 재능 기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너무 봉사활동이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경남이 고향인 천 씨는 24살에 직장 때문에 대구에 첫발을 내디뎠다. 직장에서 평생의 반려자이자 든든한 우군인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공예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세때 친척을 따라 일본으로 가면서부터다. 일본에서 본 엔틱 작품에 빠져들어 간 천 씨는 그 때부터 공예디자이너의 꿈을 키웠다.

22살에 귀국한 뒤 천 씨는 서울에서 지내며 문화센터 등에서 공예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림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갔다.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면서 천 씨는 자신의 꿈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픈 아이를 돌보고 큰 수술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은 천 씨를 자신의 꿈과 다소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림에 대한 갈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천 씨를 다시 그림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누구보다 천 씨를 잘 이해해주는 남편은 문화센터에 자신이 직접 아내를 등록했고 이때 천 씨는 우정 이창문 작가에게 배울 기회를 가졌다. 이 작가에게 천 씨는 사군자로 시작해 10여년 동안 팔군자까지 배움을 이어갔다.

배움과 별도로 천 씨의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지속됐고 천 씨는 40대 초반 노점상으로 거리에 나왔다. 비록 노점이지만 문인적 기질을 갖춘 천 씨의 독특한 수공예품은 금세 입소문을 타며 팔려나갔다. 그런데도 공식적인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는 비아냥이 들려왔다.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천 씨는 남편의 권유와 스스로 전공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서 대학 진학에 나섰다.

하지만 천 씨는 고등학교는 커녕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게 아니라 호적상의 문제로 공식 입증이 안된 것이다. 바로 천 씨는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등학교 학업 인증까지 마쳤다. 그리고 47살 나이에 대구공업대 공예액세서리과에 진학했다.

학력을 인정받고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을 떠올리던 천 씨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미소를 보였다. 오전 9시 학교에 간 뒤 오후 4시부터 노점을 운영하는 2년간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대성통곡까지 했다고 강조했다.

학생·아내·어머니·노점 등 1인 4역을 하면서도 힘든지 몰랐던 시절, 천 씨의 이 같은 행복 바이러스는 가정 경제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천 씨는 계속 노점을 고집한다. 길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작품이 어느 작업실에서 만들어진 작품보다 더 가치 있다는 확고한 생각 때문이다. 천 씨는 자신을 지탱해준 거리에서 느끼며 그 거리에서 만든 작품에 자신의 스토리가 작품에 담긴다고 믿고 있다.

결국 자기 생각이 담긴 작품을 사는 사람들은 천 씨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힘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를 떠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천 씨는 자신이 처했던 어려웠던 시절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당시 천 씨의 어머니는 30살 미혼인 가운데 천 씨를 낳아 함께 살았지만 천 씨는 12살에 어머니와 떨어졌다. 그 뒤 생사조차 모르고 살고 있다. 어머니 친척 집에서 생활하다 17살때 본가로 가 친가 식구들과 함께했다. 천 씨는 그 시절 큰 경제적인 어려움도 큰 차별도 받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그런데도 채울 수 없는 사랑이 있었다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어머니와의 이별과 천 씨에게 두 번째 난관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 언제 하늘로 떠날지 모를 딸이 태어난 것이다. 병원에서 다운증후군과 심장까지 좋지 않아 4살까지밖에 못 산다는 설명을 들었다. 천 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천 씨의 딸은 다행히 4살될 때 몸무게가 12㎏을 넘었고 대수술을 받은 뒤 지금도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처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원망한다고 바뀌는 것이 없다는 단순한 진리였다.

원망한다고 바뀐다면 원망했겠지만 천 씨는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즐기면서 살고 있으며 감당하기 힘들면 버리고 감당할 수 있으면 받아들이면 된다는 신념으로 천 씨는 살고 있다.

천 씨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숨기지 않았다. 삶의 고비마다 자신의 꿈을 이어가도록 돌파구를 열어준 것도 남편이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해 준 것도 남편이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아이들을 돌보며 천 씨가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천 씨는 지금도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어디에서든 구해온다고 남편 자랑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천 씨는 어릴 때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천미정 씨는 "최근 알려지면서 혹시나 어머니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면서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어머니 지인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또 "만약 돌아가셨다면 제사라도 지내고 싶다"고 그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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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목 기자

    • 김현목 기자
  •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