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라질 뻔 했던 가야역사의 조각

▲ 2013년 1월 16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삼국유사 초간본 기증식'에서 고 손보기 교수가 소장하다 유족이 연세대에 기증한 조선초기 판본인 삼국유사 왕력편 세부 모습이 공개되고 있다. 연합

삼국유사는 권1 왕력으로 시작한다. 왕력은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로부터 고려 태조에 이르기까지의 네 나라(신라·고구려·백제·가야)의 역대군왕과 그 약사(略史)를 도표식(圖表式)으로 정연하게 기술하였는데, 연대의 표준화를 위해 중국의 왕력까지 포함하였다.

그런데 왕력(王曆)은 단순한 연대표가 아니다. 여기에는 각 임금의 즉위 및 재위연수(在位年數), 능(陵)의 명칭과 소재(所在)·장례에 관한 기사, 왕모(王母)와 왕비·연호(年號)·대외교섭·사찰 건립·축성(築城)·제방(堤防)·시장(市場)·외침(外侵) 기사 등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틈틈이 기록되어 있어 삼국과 중국왕조를 비교하면서 사실(史實)의 요점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의 왕력은 다음과 같이 신라의 건국부터 기재돼 있다. "전한 선제 오봉(갑자) 원년 4월. 신라 제1세 혁거세, 성은 박이요 알에서 났다. 나이 13세 갑자년에 즉위해 60년을 다스렸다. 비(妃)는 아이영, 이영 또는 아영이다. 국호를 서라벌, 서벌, 혹은 사로 혹은 계림이라 하였다. 일설에 탈해왕 때 이르러 비로소 계림이란 호칭을 두었다 한다" 서라벌과 알영에 관한 여러 이름은 고대어연구에 도움을 준다. 신라의 박혁거세가 재위하는 기간, 중국 한나라는 선제·원제·성제·애제·평제의 다섯 황제가 지나갔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연표에는 같은 사실을, "갑자년, 전한 효선제(前漢孝宣帝) 순(詢) 17년 오봉(五鳳) 원년.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즉위 원년. 이로조차 진덕왕까지 성골이 됨"이라고 기재하였다. 다음 고구려의 건국기사를 보자. "제1 동명왕, 갑신에 일어서서 18년을 다스렸다. 성은 고(高)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추몽이라고도 하는데 단군의 아들(壇君之子)이다."

삼국유사의 앙력에 준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연표다.

삼국사기 권29에서 권31까지는 연표인데, 신라·고구려·백제의 연대를 간지(干支)·중국왕조와 함께 1년 단위로 기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삼국유사는 간지를 일일이 적지 않고 중요사실별로 기록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그냥 사라질 뻔 했던 가야를 그 윤곽이라도 알려준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으로부터 2대 거등왕, 3대 마품왕 등 제10대 구형왕까지 490년의 왕력을 기술한 것이다.

한편 왕력에 광무제(光武帝)를 광호제(光虎帝)라 기록했는데, 이는 임금이나 부모님, 성현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못하는 피휘의 예법 때문이다. 고려의 제2대 임금인 혜종은 이름이 왕무(王武)였다.

따라서 무(武)자를 피해 무장과 같이 용감한 의미의 호(虎)자를 쓴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연표에는 후한 광무제 수(後漢 光武帝 秀)라고 이름까지 밝히고 있는 것이 대조된다. 어떻게 보면 김부식은 차가운 사관(史官)의 입장에서 사실 그대로 썼고 일연은 예법과 인정을 살피는 따뜻한 인문학자의 자세로 적었다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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