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제 학교에 떠넘기고 교육열 빌미로 간섭·관여 학생이 행복한 교육될까

지난주는 책 한 권에 매달려 있었다. 황주환 선생님이 쓴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책이었다. 읽는 내내 참으로 마음이 복잡하고 불편했다. 솔직히 지난 40년 내 교직생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 앞에 선 느낌이었다. 아울러 비정상이 정상으로 포장된 우리 교육환경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 교사를 보는 것은 희망이면서 또 아린 아픔이었다. 우리는 교육문제를 온통 학교에다 떠넘겨 놓으려는 이상한 생각에 젖어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을 믿지 못하고 간섭과 관여를 하려 든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을 교육열이라는 말로 당당하게 포장하려 든다.

일부 기득권층은 우리 교육에서 잘못된 게 무엇이냐고 따지듯 입을 막는다. 수학과 과학 성적이 선진국과 비교해도 월등하다는 논리를 편다. 교사들의 열정과 교육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사회 분위기를 들이댄다. 세계 15세 학력평가에서 종합 2위 수준이 우리나라다. 국제올림피아드에서 매년 금메달이 아니냐. 우리와 미국 공립학교를 일대일 비교했을 때, 우리 고교가 월등하다 등등. 통계를 나열한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교육과 학교 안에서 숨 쉬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없다. 그들은 행복한가. 그들은 스스로의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은 빠져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하나 더하기 하나는 오직 둘 뿐이라는 믿음 심기에 급급해 있다. 그 이외의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며, 더구나 질문은 낙오자가 되는 길임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굴종의 교육' 을 전개해 왔다.

그런데 황 교사는 용감하게도 아이들에게 질문을 가르치려고 한다. 또 사회를 향해 메아리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장애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가. 장애 친구에게도 꼭 같은 평가기준을 적용하는 게 평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왜 정답은 나만 가져야 속이 편한가. 정답을 공유할 수는 없을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정보를 그들만 누리겠다는 행태와 다를 게 전혀 없다. 갈증을 달래기 위해 바닷물을 마시듯이 부유층들의 해소할 수 없는 탐욕을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고위층이 만든 교육 현상을 다음 계층이 따라가고 그 다음 계층이 흉내를 내고 있다. 그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또 다른 아이들을 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학력 우수생의 나라에서 교사로 살아가기'에서는 우리가 흔히 보았던 '축, 사법고시 합격' '축, 장군 승진' 대로변 현수막을 통해 그는 질문하고 있다. 성공한 그들은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사람을 칭찬하고 축하하는 게 아니라 그 자리를 보고 축하하며, 부러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성공한 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에 충실하겠다는 생각보다 그 권력으로 자신의 배나 불리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 수리하던 19세 젊은이가 사고를 당했다. 가정 형편이 좋았다면 대학 1학년의 낭만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능한 검사 출신 홍모 변호사가 화제다. 변호사 개업 몇 년 만에 오피스텔이 50여 채라고 한다.

이제 우리 교육을 향하여 질문을 던지고 싶다. 학교에서 그들에게 가르친 게 무엇인가. 죽으라고는, 부정을 저지르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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