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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19. 안동 농암 이현보 '농암종택'

하루하루를 아끼는 마음으로 650여년 조상의 유업 실천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6월12일 20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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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산과 건지산에 포근히 안겨 있는 농암종택이 이현보 선생의 어부가의 시 구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농암종택은 '어부가'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 농암 이현보(1467~1555)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다. 1370년경 최초로 이 집을 지은 분은 영천 이씨 안동 입향시조 이헌(李軒)으로, 농암의 고조부이다. 직계 자손들이 650여년을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는데, 지금은 농암의 17대 종손 이성원 씨와 종부 이원정 씨 부부가 지키고 있다. 원래 안동시 도산면 분천동(분강촌)에 있었는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사방으로 분산 이건 됐다 1990년대 초 가장 흡사한 지형을 찾아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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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의 유업을 이어가라는 뜻의 긍구당.

농암은 1498년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해 부제학, 사간, 정언을 거쳤고, 중종반정으로 경상도 관찰사,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농암은 1524년 76세에 모든 관직에서 은퇴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고향 예안으로 돌아와 독서와 시작으로 여생을 보냈고 효빈가와 농암가, 어부사 등을 남겼다. 특히 어부사는 퇴계의 도산 12곡에 영향을 줬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지게 했다. 강호문학의 전성기를 이끈 농암은 훗날 퇴계와 이이의 학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산수를 품에 안은 농암종택 앞으로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 아래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고 고운 모래사장이 하얗게 펼쳐진다. 옆과 뒤로는 푸른 산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풍광이 수려하다. 2천여평의 대지 위에는 본채를 중심으로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돼 있고 분강서원과 애일당, 강각을 합쳐서 '분강촌'이라고 부른다.

종택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시대인 1370년 경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이 처음 건립한 '긍구당'이 중심건물로 자리잡고 있다.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농암이 중수했다. 긍구(肯構)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으로 종택과 문중의 크고 작은 일이 여기서 결정됐다.

농암종택에는 긍구당 외에도 강각(江閣)과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아름다운 별채가 있다. 강각은 수려한 주변 경관과 어울리며 농암이 이끄는 영남가단의 본거지로 쓰였다. 이황, 이언적, 주세붕 등이 이곳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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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는 뜻의 애일당.

농암이 안동부사로 재직하던 1519년 9월 안동에서 큰 잔치가 열렸다. 농암은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안동 부내 8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이곳에서 '화산양로연'을 열어 장수를 축하했다. 청사 마당과 마루는 수백 명에 이르는 노인들로 가득 찼으며 농암은 노인들의 흥을 돋우려고 색동(때때)옷을 입고 춤을 췄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 사회에서 그야말로 파격적인 행사였다.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농암은 효자로 이름 높았다. 그는 1512년 늙은 부모를 위해 안동 도산면 분강 기슭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이라 이름 붙였다.

'애일'은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라는 뜻으로 나이 드신 부모를 봉양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을 '애일'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애일당'은 효를 실천하기 위해 농암이 지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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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극한 효심에 선조가 하사한 '적선'이라 적힌 어필.

1533년에는 부친과 8명의 마을 노인을 애일당에 모시고 색동옷을 입고 흰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췄다. 이날의 모임은 '애일당 구로회(九老會)'라고 전해진다.

이때 농암은 이미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정2품 홍문관 대제학이었다. 1569년에 열린 애일당 구로회에는 퇴계 이황도 69세의 나이로 참석했다.

선조는 훗날 지극한 효성과 경로정신을 치하해 선행을 쌓는다는 뜻의 적선(積善)이란 어필을 하사했다. 종택 사랑채 마루에는 650여년를 유지해 온 종택의 품격이 이 '적선'이라는 휘호 속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지난 2012년 가을,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는 농암종택에서 애일당 건립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와 기로연을 열었다. 안동시에 거주하는 각계각층의 80세 이상 남녀노인 150명 앞에서 농암의 17대 종손 이성원 씨와 권영세 안동시장은 때때옷을 입고 당시의 기로연을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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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암 종택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 전경.

이날 기로연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은 지금도 종택 사랑채에 걸려 있다. 이성원 종손은 그때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한듯, "극적인 사진이예요"라고 말한다. 사진 속에는 당시 87세의 서애종손 류영하 옹, 84세의 이근필 퇴계종손, 74세의 김종길 학봉종손, 이석희 고성이씨 원로, 이유창 전 예안향교 전교, 김병일 국학진흥원장, 류창훈 전 안동향교 전교, 박원갑 예안향교 전교 등이 종손과 함께 어깨춤을 추고 있다. 마치 '애일당 구로회'를 연상케 했다.

현재 농암종택은 한옥스테이로 운영 중이다. 고택을 체험한다면 반드시 집과 거기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종손은 권한다.

안동댐 수몰로 예안면 분천동에 모여 살던 영천 이씨 집성촌과 농암종택 주변의 명농당, 분강서원, 애일당 등이 한때 안동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이성원 종손은 종택 재건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안동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1994년 지금의 종택이 있는 땅을 발견했다. 땅을 매입하고 나니 이건 건축비가 없어 막막하던 차에 1999년 때마침 경북 유교문화개발사업이 발표되면서 국가로부터 건축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 문화적 가치가 높은 종택을 일반인에 개방했다.

종손은 이 모든 것이 조상의 음덕으로 움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터가 남아 있었던 것과 무사히 이건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종택 앞산 넘어 농암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종손은 예전 같으면 집을 돌보는 머슴이 있고 그만한 재산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스스로 머슴이자 집사, 종손의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결코 쉽지 않는 인생살이이다. 하지만 수백년 전 이곳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췄던 선비,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종손, 종손의 아내가 되어 매일 아침 따뜻한 밥을 짓는 종부의 삶 등에서 600년 넘게 내려오는 가문의 향기가 묻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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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 오종명 기자
  • 안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