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적 기득권 남용하는 자 그들의 요구 들어줘서는 안돼 제2의 조영남 없어야 할 것

지금 가수 조영남씨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재판의 심리는 그의 주업인 노래와 연관관계가 아니라 가짜 미술품 판매와 관련해서 진행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조씨가 전시·판매한 화투그림이 사실은 다른 사람이 그린 것이고, 그것을 고가에 팔아 이윤을 챙기고는 원작자에게는 쥐꼬리만큼의 제작비를 지불했다는 것이다. 위작여부가 사건의 핵심이지만 하청작가를 노예취급한 부도덕성도 작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원래 성가를 부르며 신학과정까지 밟았던 그가 이제 고상한 이미지는 팽개치고 너저분한 스캔들에다가 예술의 장르를 무시하면서 대중의 스타로서 군림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힌 추잡한 늙은이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유형의 예술인은 그 말고도 상당수가 있다. 현직 교수로서 제자들을 노예로 부려 구설수에 오른 사람도 있고, 해괴망측한 기행의 처세로 목불인견의 상태로 타락한 이들도 있다. 이런 일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안하무인격인 이런 유형의 타락은 한국사회의 격조와 질을 떨어뜨리며 그칠 줄을 모른다. 조영남식 일탈은 단순히 개인의 우발적인 해프닝이라기보다는 그런 사람들의 저변에 깔려있는 특권의식을 가진 심리적 카스트제도가 우리 한국사회 내에 실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카스트제도는 인도의 특유한 세습적 신분제도이다. 카스트란 가문·결혼·직업에 의해 결정되는 특정한 지위를 가진 집단을 말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업(業)이라 불리는 힌두교 관념에 의해 정당화된다. 카스트는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왕족·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하층민) 등 4개로 구분되며, 그 외에 불가촉천민이 있다. 카스트 제도는 오늘날에는 법률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말하자면 비록 법이 자유로운 언론, 취업, 결혼, 거주 및 이동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심리적 억압을 퇴치하지 못하고, 반성적 사고 없이, 인습에 굴종하는 한 카스트 제도는 존속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놀랍게도 힌두교와 상관없이 현재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카스트가 존재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이다. 조영남씨나 조현아씨와 같이 본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반대로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고는 맹목적으로 신봉하며 따르는 무지몽매한 대중들은 모두가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최근에 문제가 된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논란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수저논란이 단순히 부모의 소유에만 중점을 두고 부의 편중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 카스트 논의는 정신과 물질에 다 같이 영향을 끼치는 존재론적 문제이고,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 논의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가치문제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이 숙명적 카스트 제도의 철폐는 인도의 발전을 시도한 영국이 그랬듯이 모든 사람이 신 앞에 평등하고, 각자는 자기의 목적과 가치를 가진 숭고한 삶을 살 권리를 아로새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성을 무시한 배경을 도외시하고 각자의 사명을 깊이 깨달아 그것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며 힘차게 사는 것이다. 하청작업을 배척하고 자기의 꿈과 목표 그리고 재능들을 맘껏 주도적으로 펼치는 소명을 갖고 활기찬 전문적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미래의 세대들에게 이런 삶을 펼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전문적인 기득권을 남용하는 사람과 집단에 대해서는 그들의 요구를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사회는 제2의 조영남씨들이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