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도 출세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음풍농월

▲ 조선시대 학자인 최치덕이 지은 종오정이 연꽃, 소나무와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암곡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곧바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포항으로 가는 길인데 첫 마을이 손곡마을이다. 손곡마을은 300여년 전 손의일 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왜구의 침입을 피해 온 최씨 박씨 고씨의 3성씨가 모여 살았는데 풀이 많이 우거져 풀 손(蓀)자를 써서 손실로 부르다가 손곡으로 고쳐 불렀다.



종오정이 있는 마을은 손곡마을 중에서도 연정마을이라고 한다. 정자가 있는 연못가의 마을이다. 포항으로 가는 지방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논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한참 들어가면 귀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종오정이 나온다.

종오정은 조선 영조때 자희옹 최치덕이 1747년에 지은 정자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우 양쪽에는 방이 있다. 팔작지붕에 양쪽에 가적지붕을 달아 위에서 보면 지붕 평면이 '工' 자 형태를 이룬 점이 특이하다. 둥근기둥을 사용했고 기단과 주초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탑재를 주로 사용했다.

기둥의 머리 부분은 여느 정자와 달리 장식을 하지 않은 무익공으로 처리했다. 주인의 소탈한 성품을 드러내는 듯 하다. 정자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정면 처마 아래에는 '종오정' 정자안 동쪽 방에는 '무송와(撫松窩)' 서쪽 방에는 '지간헌(持竿軒)'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 옆에는 누정기도 걸려있다.

3개의 현판 글씨와 누정기는 당시 경주부윤으로 왔던 이계 홍양호가 썼다. 홍양호는 영조 당대의 대학자였다. 대사헌 평안도 관찰사 이조판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사헌을 지냈다. 영조실록과 국조보감 동문휘고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홍양호는 '종오정기'에서 최치덕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 공부를 마다하고 냉수를 마시고 글을 읽으며 이곳에 정자를 지어 손수 꽃나무를 심고 못 위에 물을 끌어 들여 흐르게 하고 그 위에 한 칸 정자를 지었다. 얼굴에 난 수염을 보고 맑고 밝아 은은한 산인의 기미가 있었다"홍양호의 현판 글씨와 기문에 답하듯 최치덕도 홍양호에 대한 시를 여럿 썼다.

▲ 자희옹 최치덕이 후학양성에 매진하려 세운 귀산서사.


삼신산의 여섯 자라가 기이하단 말 들으니

성상이 천년을 화해서 거북이 되었다 하네

화표엔 학 돌아 간 옛돌기둥만 남아 있고

왕경엔 신선 떠난 바둑돌만 남았구나

봄 지나도 지지 않는 꽃

밤 고요할 때 담월과 의좋게 지내렴인가

이래서 한평생 좋은 경치만 구경하니

계산도 금수도 아름답고 기괴하여

걸음 지지했다네

- 이계 홍부윤의 반구대 운에 화답하다-



정자 이름은 논어의 '종오소호(從吾所好)'에서 나왔다. "공자가 말했다. 부자가 되는 길이 추구할 만한 것이라면 나는 말의 채찍을 잡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리라.(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최치덕은 정자이름을 '종오정'으로 한 까닭을 이렇게 밝혔다.'오직 좋아하는 것을 따름일세. 물에 닿으면 낚시질하고 산에 오르면 고사리 캐며 버들에 물어보고 꽃찾아 음풍농월한다네.'

무송와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무송와명'에서 말년의 소회를 담담히 밝히고 있다. '칠순 몇이드뇨 남은 날이 많지 않네. 말하려니 할 말이 없어 모두 찬양하고 감탄하노라'라고 적고 있다. '지간헌'은 '낚시대 들고 다니는 집'이다. 그는 '지간헌명'에서 '낚시대 드리운다고 반드시 고기 낚는 것은 아닐세. 부지런히 때 마다 먼 조상 추모함이라! 아! 아이들아 내 오묘한 뜻 체험했으니 황천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 부끄러울 것 없으리라'라고 적고 있다.

3개의 현판에는 정자의 주인인 최치덕의 삶의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최치덕은 글공부가 뛰어났다. 5세에 처음 글을 배워 12~3세에 무경칠서(송나라때 과거 응시생이 읽어야 했던 병서, 손자 오자 사마법 등)를 다 뗐으며 이후 손매호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인근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관찰사가 치르는 소과 등에 장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벽촌에 묻혀 음풍농월했다. '연지'라는 시에서 정자 생활을 노래했다.

못 위에 정자 짓고 손님 맞아

함께 올라 난간에 의지하니

가늘게 파문일고

창문여니 냉기 스며드네

매화 소나무 좌우에 무성한데

물고기와 새가 희롱하며 날다가 자맥질 하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글 논하던 깊은 밤이라

은근히 밝은 달빛 찾아보았네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최치덕은 종오정에서 학문연구에 힘을 기울여 '역대시도통인', '심경집' 같은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에 그의 업적이 조정에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기도 했다.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주력했다. 그는 72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70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 중 10명은 등과해 벼슬을 했고 9명은 진사를 지냈다. 종오정 옆에는 학생들이 숙식을 하는 일성재와 공부를 하는 귀산서사가 있는데 '학규'를 정해놓고 제자들이 따르도록 했다.

"겨울에 경서를 읽고 여름에 시를 외우고 봄 가을에는 예를 배워야 한다. 행동 생각을 반드시 공경히 하고 절대로 희롱하지 말라. 닭이 세 번 울면 일어나 천지의 맑은 기운을 들이마시고 글을 외우고 있다가 날이 밝으면 세수하고 일과를 받아라. 매 식후에는 잠깐 휴식하되 곡기에 체함이 없도록 하라. 단정히 앉아 정독하다가 만약 정신이 혼미해지면 시원한 바람을 들이 마셔라."

정자에서 보면 연꽃 가득한 연못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오래된 측백나무와 못안으로 길게 누운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보이는 신라시대 석조와 석조연등 받침이 운치를 더해준다. 연못에는 성질 급한 연꽃 몇몇이 듬성듬성 피어나고 있다. 못둘레에는 살구나무 향나무 배롱나무들이 시립해 있고 정자 뒤는 귀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전형적인 '요산요수'의 정취에다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배롱나무 꽃이 피고 연꽃이 만개하는 7월이 되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할 것이다. "홀로 연 꽃을 사랑하나니/ 진흙탕 속에서 꽃을 피웠으면서도/오염되지 않았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웠으면서도 /그 요염함을 자랑치 않는다" 주렴계의 '애련시'를 절로 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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