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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우리 주변에는 어쩔 수 없이 ‘은밀한 것들’이 있습니다. 드러내기 불편한 것, 드러내면 효용이 떨어지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개중에는 나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사회적 금기나 통념과 불화(不和)하면서 지배층의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부당거래들(정경유착, 권언유착, 불법정치헌금, 비밀외교(대북)접촉, 전관예우 등등)은 일단 백일하에 드러나면 크게 죄악시됩니다. 엄한 사회적 징벌의 대상이 됩니다. 동일한 행위가 ‘은밀한 것’일 때는 온당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지만, 그것이 일단 밖으로 드러나게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하는 불법(不法)이 됩니다. 부득불 ‘꼬리 자르기’가 동원되고 희생양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나쁜’ 은밀한 것들은 종종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대중들의 궁금증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적합한 스토리텔링만 가미되면 어렵지 않게 많은 관객을 모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부러진 화살’, ‘부당거래’, ‘신세계’, ‘은밀하게 위대하게’, ‘내부자들’같은 영화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은밀한 것들’을 실감 나게 폭로한 덕분에 여러 사람이 큰돈을 벌었습니다.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는, 그래서 폭로의 대상이 되는 ‘은밀한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엄연히 실재(實在)하는 것이지만 드러내놓고 떠벌릴 수 없는 속사정을 가진 것들입니다. 무의식적 욕망과 관련된 것, 지배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들이 주로 그렇습니다. 예술 쪽에서 우회적인 분출구를 만들어서 그 파괴적 에너지를 적당히(은밀하게) 소진(消盡)토록 하는 것이 오랜 인간사회의 문화적 관습입니다. 이를테면 서양 전래동화 ‘빨간 모자’가 세월을 거치면서 점차 ‘오이디푸스적 주제’가 강화된 일이나, 우리의 판소리 문학들이 지배계층을 정면에서 성토하면서도 일면으론 그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앞장을 선 일이 그런 예라 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빨간 모자’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의 일단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남성 유혹자만은 아니다. 늑대라는 존재는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반사회적이고, 동물적인 경향을 대표한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걸어가라”는 학교 다니는 어린이의 덕목을 포기하고,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빨간 모자는 쾌락을 쫓는 오이디푸스적인 어린이로 되돌아간다. 늑대의 꾐에 빠져, 빨간 모자는 늑대가 할머니를 삼킬 기회를 내주었다. 여기서 이 이야기는 소녀에게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던 오이디푸스적인 문제점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빨간 모자를 늑대가 삼켰다는 것은 늑대가 모성적 인물을 죽일 수 있도록 행동한 빨간 모자에게 당연한 처벌이라고 말해 준다. 네 살짜리 어린이라도 빨간 모자가 늑대의 질문에 대답해 할머니의 집에 갈 수 있는 자세한 길을 가르쳐 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상세한 정보를 주는 목적은 무엇인가. 늑대가 그 길을 찾아갈 줄 몰랐을까 하고 어린이는 혼자 놀라워한다. ‘브루노 베텔하임(김옥순, 주옥), ‘옛이야기의 매력2, 287쪽’

어린이들은 ‘빨간 모자’를 읽으면서 자기 안의 ‘은밀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면역력을 키운다는 것이 인용문의 주장입니다. ‘빨간 모자’는 은밀하게 그 과업을 수행하는 문화적 도구이고요. 과연 그럴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런 이해와 설명은 우리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그것보다 나은 설명도 아직은 찾기 어렵고요. 어쨌든, ‘은밀한 것들’이 제 마음대로 험한 몰골을 불쑥불쑥 드러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보기 참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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