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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힐링처 십승지] 5. 상주 우복동

수려한 경관·농경지 갖춰 먹을거리·힐링 꿈꾸는 이상향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7월04일 19시39분  
▲ 운무로 뒤덮인 상주시 화북면 전경. 사진 제공= 이은경씨.
속리산(俗離山)은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나는 곳이다. 속리산 아래 골골은 하나같이 힐링처다. 승지로 꼽히는 이른바 ‘우복동(牛腹洞, 경샹북도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으로 들어가는 입구 시루봉 아래 큰 바위엔 ‘洞天(동천)’이라는 새김글이 아주 힘차게 갈겨져있다. 전투에서 용맹한 장수의 칼놀림이 연상된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로 시작하는 시조를 읊은 양사언의 행서체라고도하고 도장산 심원사 수도승 개운의 글씨라고도 한다. 누가 이곳이 십승지임을 만천하에 밝히고 싶어 만든 암각서임에 틀림없다. 동천은 한국의 이상적인 명당촌인 승지(勝地)의 중국식 명칭이다. 대를 이어 살만한 새 땅을 의미함은 같다.

명촌이 있는 곳에 명산은 필수인 법이다.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에 걸쳐있는 한국의 명산. 경북도에서 추진하는 한반도허리경제권에서 말하는 허리는 속리산 부근이라고 볼 수 있다. 경북도, 충북도, 대전시, 충남도, 강원도, 전북도를 비롯한 7개 시·도는 정책협의회를 창립하고 상생협력과 공동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속리산 주봉 청황봉은 Y자 형태의 2개의 정맥을 낳는 분기점이다. 청황봉에서 충청북도 청주와 충주를 가로지르며 안성의 칠장산까지 이어져 남한강과 금강의 분수산맥을 이룬다. 칠장산에서 하나는 서북쪽으로 수원을 거쳐 김포시 문수산까지의 한남정맥이고, 또 하나는 서남쪽으로 충남 태안의 안흥까지의 금북정맥이다.

▲ 속리산 문장대 정산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 남한강 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예부터 삼파수(三波水)라고 했다. 삼파수는 오래된 명칭이다. 조선중기 김극성의 문집에 “문장대 위의 삼파수”라는 글이 나오고, 조선후기의 <충청도 괴산군읍지>에도 “속리산 삼파수”가 등장한다. 삼파수는 황해도 구월산에도 있다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기록했다. 속리산의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때부터 중사(中祀)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지만 속리산도 수려한 봉우리가 35개(국립공원 경관자원 지정)나 된다. 설악산이 29개, 지리산은 25개다. 특히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두드러져 구봉산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에 ‘왕’자와 ‘황’자를 쓰는 봉우리가 있다는 것만해도 범상치 않은 명산임을 말해준다. 최고봉 이름이 천왕봉이었다는데 일제 강점기에 천황을 상징해 천황봉으로 개악했다고 한다. 현재 이름은 천황봉으로 되어있지만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에는 모두 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왕봉은 지리산, 무등산, 비슬산, 장수산(황해도 재령), 천왕산(경남 고성)의 주봉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장수의 주산, 월출산의 주봉, 광양의 천황봉도 있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옛날부터 명산은 사람들이 신성시해 섬겨왔다. 속리산 정상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매년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 후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맥이 끊어진지 오래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속리산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속리산은 기이하고 험준함이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고 심원함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왜 특별히 명산으로 일컬어지고 중국에까지 알려졌을까?”라는 박문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랬다. “한강 남쪽의 모든 산이 다 이 속리산을 종마루(朝宗)로 한다. 신령한 기상을 품고 기르며, 높고 넓고 깊고 두터움은 여러 산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유속리산기>)”

우복동으로 알려진 상주 용유리는 먹고사는데 필요한 물산을 짓는데 필요한 조건도 갖추었다.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복천사 동쪽을 내산이라고 하고 법주사 위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내산에는 돌이 많고 외산에는 흙이 많다”고 적었다. 흙이 많다는 외산은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양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이다. 잠시 머물렀다거 떠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살만한 가거지(加居地)의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명산에 명촌이 없을리 만무하다. 십승지 중 하나가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甑項)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정감록>). 증항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학계에서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친 속리산이니 그 언저리 어디에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 이규경은 ‘우복동변증설’, ‘우복동진가변증설’ 등의 글까지 써서 검토했을 정도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대체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화산, 광정마을), 견훤산성이 있는 장암리, 칠층석탑(보물 제683호)이 앉은 상오리 일대로 추정한다. 속리산(1058m), 청화산(984m), 도장산(828m)의 삼각형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도 그 하나로 추정된다. 이 두메산골에도 한 때 전국에서 뉴프론티어 정신으로 이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 승무산에서 본 용유천과 화북면소재지 전경
우복동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장수의 고장으로 여겼다.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 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 정약용이 지은 ‘우복동가’라는 글귀다.

속리산의 수려한 경관, 삼재가 들지 않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춘 삶 터 등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으로 지목됐다. 조선시대에 우복동은 승지의 대명사다. 아울러 많은 인민들이 생활터전을 일구는 장소의 공간으로 알고 찾아왔다.

속리산 우복동과 지리산 청학동은 모두 깊은 산중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복동은 소의 배 속 같다. 편안하고 기근이 들지 않는 곳이다. 지형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우복동은 속리산 바깥 기슭의 분지에 있어 농경지가 있고 비옥하다. 십승지의 땅, 우복동은 조선후기의 정감록촌이라는 이상향의 전형이다.

2010년 8월28일 한양대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과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가 공동 주관한 ‘우리나라 십승지의 재조명’학술세미나에서 ‘상주 우복동’과 ‘변산 호암’의 십승지를 발표한 채영석씨는 우복동은 용유리 화산 광정마을이라고 단언한다. .

‘용이 즐겁게 논다’는 뜻의 용유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병천과 함께 이상향 터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청화산 남쪽을 돌아 동쪽 용추로 들어가는 것이 병천이고, 청화산과 도장산 사이를 용유동이라 부른다. 시루 항아리 단지의 뜻이 담긴 병천(甁川)을 예찬했다.

채영석씨는 “화산, 광정마을은 북쪽으로 청화산이 양팔을 크게 벌려 병풍을 드리우고 동쪽에는 시루봉의 자루가 봉긋하게 솟구쳐 그 자락을 길게 드리우며 생기를 불어넣는다. 남쪽의 진입로는 도로막이가 막혀있고, 수구막이도 숨겨진 터”라고 밝혔다.

상주도 거점전을 치루는 것과 다른 전 전선 전투전인 현대전에서는 전란을 비켜나가지 못했다.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상주 화령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화령은 상주-보은 사이 고개다. 조선시대에는 보은에서 화령을 거쳐 상주에 이르는 도로가 발달했다. 상주시는 화령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4개면이 있다. 화령은 본래 신라의 답달비군(荅達匕郡)인데 경덕왕 때 화령군으로 고쳤다. 화령의 옛 이름인 답달은 큰 산이라는 뜻이다. 상주는 속리산과 뗄 수 없는 운명이다.

최정섭 상주시 화북면장은 “최근 화북면에는 십승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잦고, 귀농 귀촌 하려는 도시인구들의 문의가 자주 온다”며 “두메산골 화북이 새로이 관심지역으로 대두하고 있어 가슴벅차다”라고 말했다.

시루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떡을 찌는 그릇이다. 과거 삼재불입지 우복동이 현대에는 먹을거리와 힐링을 함께 꿈꾸는 자들의 안식처로 부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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