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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고령 점필재 김종직 종택

350여년 전통 일선김씨 집성촌…김종직 선생 후손 세거지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7월10일 16시00분  
점필재 종택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의 개실마을은 현재 62가구 158명이 정답게 살고 있는 전형적인 민속마을이다. 조선시대 중엽 영남사림학파의 종조인 점필재(점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선생의 후손 일선김씨 집성촌으로 350여년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곳에는 민속자료 제62호 점필재 종택, 문화재자료 제111호 도연재, 유형문화재, 점필재의 문화유품 등의 문화재가 있다.

조선 중엽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후손의 세거지로써 본래 고령군 하동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가동과 하가동을 병합해 합가동이라 하고, 쌍동면에 편입됐다가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의 병합으로 현 쌍림면으로 편입됐다.
쌍림면 개실마을 전경

도연재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과업(過業)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건립한 강학지소(講學之所)이다. 종택(宗宅)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m 거리를 두고 있다. 점필재의 15세 주손인 김창현(金昌鉉)대에 건립되었다 하며, 상량문(上樑文)에는 1886년으로 기록돼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방형(方形)으로 토석담당을 두른 일곽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을 마주하여 동남향으로 좌정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일(一)자형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둔 2통 칸 온돌방의 우측에는 전면이 개방된 대청을 두었는데 우측면과 배면의 각 칸에는 쌍여닫이 판문, 대청과 방 사이에는 2분합틀 문을 달아 개방할 수 있게 하였다. 좌측에는 전면에 툇마루와 같은 폭으로 하부에는 광, 상부에는 누마루를 설치했으며, 그 뒤쪽의 하부는 아궁이 부엌을, 상부는 방에서 드나들 수 있는 다락을 설치했는데 전면에 높은 누마루를 놓은 수법이 주목된다.
도연재 전경

구조는 막돌 쌓기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창방으로 기둥머리를 결구하고, 창방 위에 소로받침을 두어 장혀를 받게 한 소로수장 집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로 약한 굴곡이 있는 대량 위에 판재를 겹친 용자주를 세워 그 위에 이중량을 놓고 종택의 사랑채와 같은 삼각형 발이 있는 원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재목은 비교적 후하게 사용하였다. 대문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가운데 대문 칸 좌우에 측간과 방을 두었다.

점필재 종택은 안채는 1800년경에 건립하여 1878년에 중수하였고, 사랑채는 1812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산김씨 문충공파(善山金氏 文忠公派)의 종가이다.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성종 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추진한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인물이었다. 마을 뒷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이룬 대지에 남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뒤에는 안마당을 마주한 정침의 좌우에 고방채와 중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튼 입구(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안쪽에 툇마루를 둔 2칸 방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전면이 개방된 대청을, 좌측에는 앞뒤로 방과 작은 부엌을 두었다. 막돌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는데, 대청의 앞쪽 가운데 기둥은 원주이다. 부가구는 3량가로 대량 위에 원형판대공을 놓아 종량을 받게 하였다.

점필재 종택의 문서는 영남사림파의 종장(宗匠)인 김종직 가문의 전적 및 수택유품(手澤遺品)이다. 그는 1461년 (세조 7)에 등제(登第) 한 이래 내외의 고관을 역임하였다.
점필재 문적 유품 종가문서

김종직의 수필(手筆) 당후일기(堂後日記)와 교지(敎旨)·첩지(牒旨) 및 김종직의 모부인(母夫人)의 서찰, 김종직의 후부인(後夫人) 문씨의 분재문기(分財文記)와 호구단자(戶口單子), 전답매매명문 등 성종조부터 19세기까지의 세대별 고문서 114점 및 상아홀(象牙笏), 성종하사(成宗下賜)의 필옹옥우(畢翁玉友(玉현))·유리주병(琉璃酒甁), 매화(梅花)현 등 김종직 수택유품이다.

1482년 11월 1일에서 12월 25일 사이의 김종직의 승정원일기인 당후일기는 전후가 탈락되었고, 유품은 원형대로, 고문서는 훼손이 된 것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전적과 유품은 김종직이 참혹한 무오사화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되고 있다는 데서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사료로서 가치도 매우 높다.

특히 고문서는 조선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 영정
-김종직 선생 일대기, 29세에 벼슬길…관찰사·판서 등 지내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 또는 효관,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이다. 1431년 (세종 13년)에 아버지 숙자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밀양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23세 봄에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주역 등 경전을 탐독하고, 25세에는 세조 즉위를 축하하는 동당시에 종형 종석과 함께 응시하여 형제가 모두 합격하였으나 이듬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밀양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복상여묘 하였다.

29세에 식년문과에 급제, 벼슬길이 열려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제수되었는데 문명으로 유명하여 각종 책문을 임금께 올릴 정도였다.

40세에는 성종이 즉위하여 경연을 열고 재행이 겸비한 학자를 선발하여 예문관을 겸직케 하였는데 응선한 19명 중 선생이 첫 번째 선발되어 예문관수찬, 지재교, 경연검투관/기사관을 겸하였다.

선생은 경기, 강원, 전라도 3도의 관찰사, 한성좌윤, 형조판서, 지경연, 홍문과제학 성균관시를 거쳐 1489년(성종 20년) 59세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병으로 사퇴하니, 성종은 지중추 부사로 이배하고 특명으로 전직을 바꾸지 말라하고 사관을 보내어 돈유하고 녹봉을 받으라 하였다.

점필재는 세차례나 상소로 사퇴했지만 성종은 윤허하지 않았고, ‘점필재는 단직하고 성긴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이 넓고 깊다’ 라는 내용의 친재비답을 두 차례나 보내어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의 저서로는 유두유록, 청구풍아, 오경석의, 당후일기, 동문수, 여지승람, 1천200여편의 시(詩) 등이 전해오고 있다. 선생을 보양하는 서원은 밀양 예림서원, 선산에 금오서원 등 8곳에서 재향하고 있다.

무오사화로 몰락한 김종직 가문(善山金氏)은 경남 밀양, 합천 야로를 번갈아 전소하면서 고령용담으로 이거하여 살면서 임진왜란을 당하고 1651년(효종2년) 점필재 김종직의 5대손 남계공 김수휘가 이곳 ‘가곡’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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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항 기자

    • 권오항 기자
  • 고령, 성주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