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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래전에 읽은 ‘카인의 후예‘(황순원·1954)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북한 쪽 해방공간의 계급갈등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지주 청년 박훈, 그의 애인 오작녀, 오작녀의 아버지 마름 도섭 영감, 공산당 지도원 개털오바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격변기를 살아내야 했던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들의 이름입니다. 황순원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소설의 중심 스토리라인 역시 박훈과 오작녀의 에로티시즘 서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작가 황순원은 인간들이 남녀노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소나기’나 ‘별’ 같은 작품에서는 소년기 에로티시즘을, ‘늪’,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는 청년기 에로티시즘을, ‘독짓는 늙은이’, ‘그물을 거둔 자리’ 같은 작품에서는 노년기 에로티시즘을 그렸습니다. 

시기별로 다양할 뿐만 아니라 형태별로도 무척 다양한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것이 황순원 소설입니다. 그런 황순원 소설 중에서 가장 황순원다운 소설을 한 편 꼽으라면 저는 ‘카인의 후예’를 꼽겠습니다. 인생의 최고 가치인 ‘사랑’을 박훈과 오작녀의 ‘계급을 뛰어넘는 희생과 헌신의 인간애’를 통해서 여실히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황순원답다’라는 말이 찬사 일변도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카인의 후예’를 읽다 보면 군데군데 나타나는 작가의 ‘지주적(地主的) 상상력’이 눈에 거슬릴 때가 있습니다. 많이 가진 자가 시혜적(施惠的)인 활동을 통해서 세상을 밝게 만들어나간다는 내용과 비인간적인 토지개혁 때문에 애꿎은 목숨이 희생된다는 내용 같은 것은 일견 시대착오적인 작가의식의 편린을 엿볼 수 있게도 합니다. 

본디 작가란 자신의 출신 계급에 얽매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른바 ‘부유(浮游)하는 인텔리겐챠’라고 해서 이 계급 저 계급 사이를 떠다니면서 자유롭게 ‘진실’을 포착하는 게 작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작가 황순원은 작가의식 면에서 다소 부족한 면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황순원의 문학사적 위치가 아예 소멸하거나 크게 흔들린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작가 황순원은 여전히 한국문학이 낳은 ‘위대하고 은밀한’ 유산입니다. 그는 여전히 한국문학의 적장자입니다.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했고, 그 사랑에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는 ‘카인의 후예’를 쓴 지 10년 뒤에 ‘일월’(1964)이라는 장편소설을 통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인간차별’의 문제를 철저히 파헤쳤습니다. 백정의 핏줄을 타고난 인철이라는 한 젊은 건축공학도를 등장시켜 우리가 시급히 척결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존재라는 것을 잘 보여준 것입니다. 7, 80년대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에서 황순원 선생이 보여준 ‘행동하는 양심’의 자세도 후학들에게는 큰 귀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 황순원이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것은 다름 아닌 ‘99%의 개, 돼지’라는 말 때문입니다. 한 가진 것 없는 모자란 인물이(‘카인의 후예’에 나오는 ‘개털오바’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말을 내뱉은 모양입니다. 제가 젊어서 서울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의 어떤 특별하게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을 ‘사람’과 ‘사람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나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사람 비슷하게 생긴 것’ 축에 끼였습니다. 

이를테면 “사람 비슷하게 생긴 것이 하는 짓을 보면 기특하다”는 식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참 모진 인간들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런 ‘사람 비슷한 것들’, 진정한 ‘카인의 후예’에 제가 속하지 않고 여태 살아온 것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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