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411호로 지정된 회재 이언적 종택인 무첨당 모습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이 500여 년 동안 한 마을에 함께 거주하며 공존하고 있는 경주 양동마을.

경주시내에서 형산강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20km 쯤 가다보면 기와집과 초가집이 한 폭의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의 양동마을이 나온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적인 양반집성촌인 양동마을은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소박하지만 기품이 담긴 건축물이 있고,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유서 깊은 양동마을.

이 마을 중앙부에 해당하는 물봉골 중앙에는 여강이씨 가문의 대종택인 무첨당이 자리 잡고 있다.

1964년 보물 제411호로 지정된 무첨당에는 현재 회재 이언적 17대 종손인 이지락(49)씨가 종부인 신순임 씨와 함께 살고 있다.

△양동마을과 회재 이언적

현재의 양동마을이 이뤄진 것은 양민공 손소(1433년~1484년)가 처가 마을에 살면서부터다.
무첨당에서 바로 본 양동마을 전경

손소에 이어 그의 사위가 된 찬성공 이번(1463년~1500년)도 양동마을의 처가로 장가를 와 회재 이언적을 낳으면서 그의 후손들이 번성했다.

여강이씨는 처가인 경주손씨를 따라 양동에 입향한 이래, 경주손씨와 500여 년을 함께 했다.

특히 이언적 이후 영남의 명문거족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영남을 대표하는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양동마을의 여강이씨는 조선시대 경주지역에서 가장 많은 문과와 사마시 합격자를 배출했으며, 가장 많은 문집도 남겼다.

이들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서, 선조의 학문적 업적을 가학으로 계승하고 다시 후손들에게 그것을 전수했다.

이로 인해 회재 종가는 그 오랜 역사성과 함께 지금까지도 다른 어느 종가보다도 종가문화를 더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년~1553년)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인 손중돈의 근무지를 따라다니면서 기초적인 학문을 익혔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해 이조 정랑을 비롯한 인동현감, 사헌부장령, 밀양 부사 등을 거쳐 1530년에 사간에 이르렀다.

이 후 김안로와의 불화로 파직됐다가 1537년에 다시 기용돼 전주 부윤,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한성부 판윤, 이조형조예조 판서, 경상도 관찰사, 의정부 좌찬성 등의 관직을 지냈다.

그의 학설은 퇴계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줬으며, 저서로는 ‘대학장구보유’, ‘속대학혹문’, ‘봉선잡의’, ‘구인록’, ‘진수팔규’, ‘정용구경연의’ 등이 있다.

1569년(선조 2년)에 명종 묘정에 배향되고, 1573년에 경주 옥산서원에 모셔졌으며, 1610년(광해군 2년)에는 문묘에 모셔졌다.

△무첨당과 종가의 건축물

양동마을의 건축물은 설창산에서 뻗어 나온 능선과 능선 사이 물(勿)자 모양 골짜기에 지어졌다.

하지만 건축물들은 그 영역이나 배치에 있어 유교적 이념이 강하게 작용됨과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강이씨 가문의 경우 마을 안쪽 중앙부에 대종택인 무첨당이 자리 잡고, 그 주변에 수졸당, 양졸당, 향단 등 이씨 가문의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은 마을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옥산리에 있는 계곡에 위치해 있다.

여강이씨는 1508년 무첨당을 시작으로 1840년 강학당까지 10여개의 건축물을 건립했으며, 현재 대부분이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무첨당은 한옥 건물 중 보물로 지정된 많지 않은 건물 중 하나로 회재 이언적 종가의 일부다.

무첨당이 있는 건물은 회재의 부친이자 손소의 사위인 이번이 양동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던 집이다.

마을 안쪽 물봉골 언덕에 남향을 하고 있는 큰 저택으로 별채인 무첨당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뤄진 본채와 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무첨당은 앞면 5칸에 누마루를 달아내 놓은 ‘ㄱ’ 자형 건물구조로, 종가 손님을 맞는 공간이나 제사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로 집안의 큰 행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의 등에 사용됐으며,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고 있다.

특히 한쪽 편에는 ‘ㄱ’ 자로 달아내 놓은 2칸 규모의 3면이 뚫려 있는 누마루가 있어, 집주인이 이곳에서 독서, 휴식 등으로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대청 동쪽 방문 위에 걸려 있는 흥성대원군 이하응이 남긴 ‘좌해금서’ 현판을 비롯해 여러 현판이 있어, 당시 무첨당이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논하는 선비들의 교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이 경상 감사에 부임할 때 중종이 그 어머니의 병환을 보살펴 돌볼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해 지어 준 집인 향단은 보물 제412호로 외부의 지붕 구조와 내부 구조가 화려하고 세밀한 것이 특징이다.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보물 제413호 독락당은 이언적이 옥산 일대에 별업을 개창하면서 지은 건물로 옆쪽 담장에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냇물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독락당 인근에 있는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고 있으며,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2대 서원으로 꼽힌다.

▲ 회재 이언적 17대 종손 이지락
△회재 종가 17대 종손 이지락

여강이씨 종가인 무첨당에는 현재 17대 종손인 이지락 씨가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다.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지락 종손은 대학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고향과 무첨당을 지키고 있다.

경북대에서 한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현재 무첨당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과 함께 지역 대학에서의 강의와 한문번역 일을 하면서 종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매일 아침 넓은 마당의 풀을 뽑고 청소를 하면서도 사람냄새 풍기는 종가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27세 때부터 22년 동안 종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종가 문화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지락 종손은 “세월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만큼 이제는 종가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어렵다’, ‘힘들다’라는 단어를 빼고 싶다”며 “우리 앞에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도 종가라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동마을 운영위원회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세상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시대가 왔지만, 500년 전통을 이어 온 양동마을의 가치를 이어가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서 문화적으로 양동마을의 고유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기환 기자
황기환 기자 hgeeh@kyongbuk.com

동남부권 본부장, 경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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