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니 썩은 서어나무 속이다
내가 잎이었는지, 잎의 언저리에 피는 헛꿈이었는지
불우한 생각이 각설탕 태우는 냄새 같은

기억 같은 건 믿지 말라, 그 말을 새가 물고 있는 동안 네가 내 안에 멈추어 있었는지, 비어 있었는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이 나에게 묻는

눈발이 내리는 날
서어나무 발자국은 길 가운데 멈추고, 서쪽 뿌리에서 어떤 처연한 결기가 걸어나온다

수첩에 적어 둔 계절은 느리게도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네가 내 안에서 눈에 덮여 있는 저녁은 갈까마귀 목덜미 빛이다

아침에 먹는 아스피린으로 내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너에게 가다보면 나는 조막만 해진 밀랍인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이란 허공의 말이 천천히 지혈되고 있었다


감상) 너를 잊을 수 있게 도와 줄게, 너의 손을 잊을 수 있게, 너의 발을 잊을 수 있게, 너의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너의 사랑을 잊을 수 있게 도와줄게, 잊는다는 것도 모르고 잊게 도와줄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네가 사라졌다고 네가 믿을 수 있게 도와줄게(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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