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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같은 사람과도, 다른 사람과도, 살아있는 한 매일매일 대화를 나눕니다. 물론 묵언 수행과 같은 대화 없는 삶도 있겠습니다. 그런 때는 자기 안의 또 다른 ‘나’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사람마다, 때마다, 장소마다 나누는 대화의 내용과 형식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부부 사이에서는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인 대화를 잘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자식 교육 문제, 가정 경제 문제, 본가(시댁, 친정) 문제 등 피부에 와 닿는 생활적 소재가 주된 내용이 됩니다. 대체로 가족 간의 대화는 생활적이고 본능적인 것들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역설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끼리도 서로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 이 사람이(아이가, 어른이) 이런 사람(친구, 분)이었어?”라고 놀라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비로소, 생활적인 문제를 벗어날 때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대화의 내용을 살피면 사람됨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속물인지 진국인지, 커브볼인지 돌직군지, 계산만 하는 삶인지 도전하는 삶인지, 현실적인지 낭만적인지, 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절로 사람됨이 드러납니다. 오랫동안 운동도 같이하면서 저와 친하게 지내는 제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미혼의 여교사입니다. 착하고, 성실하고, 생활력 있고, 예쁘고, 건강한 친굽니다. 하루는 멋있게 옷을 차려입고 나타났습니다. 보통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잘 다니는데 그날은 단아한 정장 차림에 하이힐까지 신고 나타났습니다. 완연하게 1등 신붓감이었습니다.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런 찬사에 데면데면했습니다.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그 친구가 볼멘 목소리로 그 사정을 밝혔습니다. 오늘 그렇게 입고 출근을 했더니 직장에서도 모두 그런 반응을 보이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옆자리의 나이 많은 여선생님이 돌연 돌직구를 날리더라는 겁니다. “이제 입만 꾹 닫고 있으면 되겠다”라고요. 그 말에 모두 빵 터졌습니다. 평소 본인이 이리저리 돌직구를 많이 날린 대가였을까요. 그 말을 전하는 표정이 또 재미있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나?”라는 표정이었습니다.

‘법담(法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 이야기라고 해서 변호사를 찾아가서 나누는 법률상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진흙탕 세간을 무사히 잘 건널 수 있을까에 대해서 서로 진솔한 마음을 나누는 대화입니다.

잘 아는 문학비평가 한 분이 자신의 책 읽기를 그것에 비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불법을 토대로 인간 한용운과 그의 시를 향해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던 자신의 독서 경험에 대해서 ‘행복한 법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효구,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

살면서 내내 모든 대화를 ‘법담’의 경지로 밀어 올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갈등도 없고 불화도 없고 상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도량(道場)이 아니기에 ‘법담’만으로는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욕도 하고 때로는 갈라서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사 상대를 존중하는 대화적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요. 결국은 다 동포(同胞) 아니겠습니까. 사드 배치 문제로 온 나라가 아비규환입니다. 한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모두 ‘법담’ 한 자락씩 마음에 깔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 역시 꼭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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