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체임블린 영국 수상과 뮌헨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루데덴란트를 요구했다. 체임블린은 유럽 평화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체임블린의 대 실수였다. 히틀러는 뮌헨회담 1년도 안돼 폴란드를 침공, 2차대전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수상직에서 물러난 체임블린의 뒤를 이어 처칠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처칠이 수상에 취임할 당시 영국은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다. 폴란드와 덴마크, 노르웨이는 이미 히틀러 손에 들어갔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도 항복한 상태였다. 영국과 힘을 합쳐 싸우는 프랑스도 풍전등화나 마찬가지였다. 

처칠은 취임식에서 외쳤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노력, 눈물과 땀 뿐이다" 이 명연설은 오직 영국 홀로 독일과 맞싸워야 하는 영국 국민에게 큰 용기가 됐다. 소련 침공을 노리던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처칠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시간을 벌기 위한 히틀러의 책략임을 간파한 처칠은 히틀러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영국 혼자 힘으로 독일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처칠은 동맹국이 절실했다. 처칠은 미국의 참전유도를 위해 총력전을 폈다. 외무성을 통하지 않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 전쟁 기간 중 처칠이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가 950통이나 됐다. 루스벨트로부터 답장도 800통이 왔다.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처칠은 쾌제를 불렀다. 

"히틀러도 끝났다. 일본도 으스러지게 됐다" 처칠은 곧바로 미국을 방문, 루스벨트와의 신뢰를 구축했다. 처칠은 승리를 위해 자신이 싫어하는 스탈린과도 소통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처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낸 원동력은 고립주의 탈피의 결단이었다. 
캐머런 총리의 실패는 선배 총리의 교훈을 망각한 것이 유죄다.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할 ‘브렉시트’를 나라보다 총리 자리에 눈멀어 내놓은‘국민투표 공약’이 악수였다. ‘정치거인’ 처칠에 비해 잔챙이다. 캐머런이 너무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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