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 한결같은 충과 효 실천 가문의 자랑

△충효(忠孝)의 덕목을 이어온 소재 종가(蘇齋宗家)

타지에서의 긴 유배생활에서도 유자의 덕목인 효를 실천했던 소재 노수신 선생의 종가는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화서면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화령’으로 불리던 유서 깊은 고장인데 상주와 광산 노씨의 각별한 인연은 상촌 노숭 선생이 상산 김씨의 딸과 혼인을 맺으면서 시작됐다.

이후 소재 선생의 7대조인 ‘노상인’이 화령으로 들어와 터를 잡았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화령에서 소재 선생을 비롯한 광주 노씨 경평공파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긴 유배생활에서도 빛나던 노수신의 삶

소재 노수신(1515년-1590년)의 본관은 광주(光州)고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다.

소재 선생은 오름 막과 내림 막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는데 29살 때 대과(大科)에 급제해 3장(三場)의 장원을 모두 차지하는 천재였으며 모두가 선망하는 이조좌랑(吏曹佐)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앞날이 밝게 빛나는 사림의 젊은 인재였다.

그러다 1543년(중종 38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파직당해 순천으로 유배됐다가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죄가 더해져 순천에서 진도로 다시 유배돼 20년간의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소재 선생은 유배생활 중에도 퇴계 이황과 같은 유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학문을 논하는 등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 결과 ‘숙흥야매잠’과 ‘대학장구’ 등과 같은 서적에 해석을 달아 많은 사람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통해 당시 성리학의 권위자였던 퇴계 이황과 학문적으로 당당히 견주는 인물로 인식됐다.

특히 진도로 유배됐을 당시는 유교적 예에 밝지 못하던 진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조선의 근본인 유교를 잘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까닭에 소재 선생은 상주 출신이지만 20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던 진도에서 더욱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기나긴 그의 유배생활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드디어 끝을 맺는다.

선조는 즉위와 동시에 소재 선생을 불러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까지 제수했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보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두 붕당을 서로 화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다 1589년(선조 22년)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그 사건의 주인공인 정여립을 추천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후 연로한 나이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한동안 잊혀 지내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문의(文懿)’란 시호가 내려졌는데 1693년(숙종 19년)에 ‘문간(文簡)’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효의 실천이 남 달랐던 광주 노씨 가문

소재 선생을 대표로 하는 광주 노씨는 충(忠)과 효(孝)를 매우 중요시 하는 가문이다.
특히 상촌 선생과 소재 선생의 삶 속에서 효(孝)와 관련된 사례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광주 노씨가 상주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상촌 선생은 노모 이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났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침 저녁으로 노모의 진짓상을 직접 가져다 드렸고 93세로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프게 울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소재 선생의 문집에 전하는 효제부(孝悌賦)를 보면 부모에 대한 효심과 형제간의 우애를 잘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소재 선생은 실제로 퇴청해 집에 와서는 짧은 옷을 입고 부엌에 들어가 몸소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부모님께 바쳤다고 한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도 고기를 낚거나 꿩을 사냥하면 잘 보관해 뒀다가 사람을 통해 화령으로 보내 부모님을 봉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노숭영정과 광산보략

‘노숭영정’은 상주와 인연을 처음으로 맺었던 상촌 선생의 영정인데 이 영정은 1402년(태종 2년) 서울에 보관돼 있다가 1658년(효종 9년)에 11세손인 봉화 현감 노경명에 의해 상주 화령으로 옮겨졌다.

이 영정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에도 여기저기 옮겨지는 등 고난이 많았는데도 후손들의 각별한 관심 덕분에 지금까지 잘 보관돼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생겼을 때마다 후손들은 자신의 안위보다 영정을 더 챙김으로써 진정한 효를 실천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을 견디다 보니 약간의 훼손이 생기기도 했지만 200여 년 전에 모사한 영정은 현재 상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후손들이 조상을 잘 모시기 위해 노력했던 유물이 노숭영정이라면 반대로 후손들이 가문을 잘 단결해 유지시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유물은 ‘광산보략’이다.

1581년(선조 14년)에 소재 선생이 대호군 노서부터 자신까지의 계보를 잡은 광주 노씨들의 족보 초본이다.

족보는 본래 조상을 숭배하고 가문의 단결을 위해 자기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것인데 소재 선생은 자신을 비롯한 후손들이 조상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가문이 잘 보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족보를 작성했으리라 짐작된다.

이 유물은 현재 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218호로 지정돼 있다.



△소재 종가를 지키는 사람들

종가는 제사를 받드는 종손을 중심으로 유지된다.
소재 선생은 자신의 직계 자손을 종손으로 두지 못하고 그의 동생인 ‘노극신’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종가를 잇도록 했다.

이후 1693년(숙종 19년)에 소재 선생은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아 ‘불천위(不遷位)’로 받들어진다.

소재 종가의 종손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직계 혹은 양자를 통해 500년 종가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노병학’씨 역시 양자로 들어와 젊은 나이에 종손으로 있으면서 지금의 소재 종가를 열심히 이끌어 나가고 있다.

오늘날 소재 종가에서는 소재 선생의 삶을 온전히 되찾고자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2015년에는 ‘소재 노수신 선생 학술문화진흥회’에서 상주문화원과 함께 ‘소재 노수신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소재 종가에는 젊은 종손을 비롯해 종손들의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을 옆에서 보필해 주는 문중의 어른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종가 차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소재 선생의 삶을 재조명한다면 500년을 이어온 소재 종가의 미래도 더욱 밝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성대 기자
김성대 기자 sdkim@kyongbuk.com

상주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