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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며칠 전에 “뱃사람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배 위에서였습니다. 갑판에 혼자 있는데 같이 가는 일행 중의 한 분이 갑자기 다가오더니 그렇게 물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한 문학단체에서 ‘여름학교’를 이웃 나라에서 연다고 해서 스스로 휴가를 허락해(?) 부랴부랴 따라나선 길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동행 중 행사를 주관하는 오랜 문우 두어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 정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문학판을 떠난 지가 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뱃사람’인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되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아닌데요?”하고 말았습니다. 상대가 약간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고(당신은 생긴 것이 전혀 글하고 상관없는 사람 같은데 왜 따라 왔느냐는 표정이었습니다), 저 역시 무명(無名)을 좀더 즐기고 싶어서 그 정도로 대화를 마감하기로 했습니다.

제 몸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을 들은 지도 좀 되었습니다. 특히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더 그랬습니다. 팔다리가 굵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학교 근처에서는 전공이 체육이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옷 가게나 자동차 가게 같은 곳에서는 “젊어서 운동 좀 하신 모양이죠?”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머리 짧게 깎고 친구들과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데 저쪽에서 술이 한 잔 된 어떤 건장한 사내가 저를 한참 노려보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환갑을 넘긴 중늙은이가 되어서 “뱃사람이세요?”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칠판 앞에 서서 문학을 가르쳐온 문사(文士)의 말로(末路)치고는 좀 황당한 것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제 몸을 사랑한 세월이 짧지는 않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공을 많이 들인 편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몸의 존재 양태 중의 하나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정신주의’는 늘 몸과 함께 해왔습니다. 주자는 ‘인간의 본성은 도의 형체이며, 마음이란 본성의 집이고, 몸이란 마음의 거처이며, 사물은 몸이 타고 다니는 배와 수레다(故康節云 : 性者, 道之形體; 心者, 性之郭; 身者, 心之區宇; 物者, 身之舟車)’(‘朱子語類’ 권1, 3쪽) 라는 말이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주일무적(主一無適·마음을 한 군데 집중해 잡념을 없앤다)이라는 마음 공부법을 강조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것도 반드시 몸 공부가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만 읽어 머리만 키운 채 허약한 팔다리를 그대로 방치하고서는 제대로 된 주일무적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 제 경험칙입니다. 무슨 깊은 궁리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제가 평생 살아오며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냥 느낀 점입니다. 

오래전부터 수신(修身)의 지침으로 인용되는 ‘예기’의 내용에 ‘군자의 모습은 여유 있고 한가로워야 한다. 높은 사람을 볼 때는 단정하고 삼가야 한다. 발의 모양은 무겁고, 손의 모습은 공손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하고, 입의 모습은 조용하고, 목소리는 고요하며, 머리 모습은 곧게, 기상은 엄숙하고,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럽고, 안색은 엄숙하고, 앉은 모습은 시동(尸童·옛날 제사를 모실 때 위패 대신 앉혔던 아이) 같아야 한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유가에서 이렇듯 사람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조밀하게 기록한 것도 그만큼 몸과 마음이 밀접한 관계라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 한 이치도 마찬가지였고요. 분노, 공격성, 증오, 공포, 위축, 투기 등의 감정은 포유동물이 공통으로 타고나는 본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항상 즉각적인 생리적 반응으로 표출됩니다. 그것들에 대항해서 외강내유(外剛內柔), 평생 수신으로 수심 하는 것, 그것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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