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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26. 원주변씨 간재종택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7월31일 17시28분  
간재종택 입구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있는 간재(簡齋) 변중일(1575~1660) 종택. 금계리는 금제, 검제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원히 재앙이 없는 천년불패의 땅으로 불려왔던 곳. 안동 3대 토성인 안동김씨, 권씨, 장씨의 시조묘가 들어선 이곳에 원주변씨 간재종택도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봉정사로 가는 도로 옆에 원주변씨 간재종택과 충효문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었고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홍살문이 서 있고 입구에는 연못과 ‘금학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종택 앞 담장을 뚫고 서 있는 향나무 고목은 오랜 세월 이 집안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안동지역 원주 변 씨들이 자랑하는 대표 인물인 변중일은 안동출신의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송될 정도로 효자로도 유명하다. 또한 나라를 향한 충성심도 남달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전장에 나아가 생사를 돌보지 않고 싸웠던 인물이다. 그의 효행과 충성심은 당시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고, 사후 100여 년이 지난 후에 지역 유림은 그를 불천위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왜병도 감동한 ‘하늘이 낳은 효자’

간재 변중일은 ‘하늘이 낳은 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효심이 각별했다. 간재의 효심을 드러내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땐가 어머니가 병이 났다. 진맥을 한 의사는 “꿩고기를 먹으면 낫는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큰 눈이 내려 변중일이 꿩을 잡으러 갈 수도 없어 애를 태우고 있는 중에 우연히 꿩 한 마리가 그의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꿩을 잡아 모친에게 요리해 드리자 효험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의 효심에 하늘이 감응한 결과라고 했다.

18세 때인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안동까지 밀려들자 동네 사람들 모두 숨기에 바빴다. 집안에는 늙고 병든 조모와 어머니가 함께 있었다. 조모는 여름 더위에 이질까지 만나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위중했다. 그는 먼저 모친을 업어 빽빽한 삼밭 속으로 피신시키고 조모를 업고 피신하려 했으나 천식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왜병들이 집으로 들어와 그를 때리며 끌고 나가 칼을 빼 들고 죽이려 했다. 이에 변중일은 “차라리 나를 죽이고 팔순의 조모님은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진심 어린 효심에 감복한 왜병은 “이만한 효성은 참으로 처음 보는 일이다”라며 조모를 부축해 간호하도록 했다.

이어 왜병들은 “우리가 떠나고 난 후에 다른 왜병이 오면 화를 또 당할 수도 있으니 신표가 있어야 할 것”이라면서 깃발 하나와 칼 한 자루를 줬다. 결국 왜병들은 집기 하나 손대지 않고 돌아갔다.

당시 왜병으로부터 받은 ‘일본도’는 지금도 간재종가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 전투 참여

임진왜란으로 한양에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고, 학봉 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로 안찰할 때 간재는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려하는데 비록 나 같은 초야의 미신(微臣)이라도 어찌 힘을 다해 나라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뒤, 집에 있는 쌀 100석을 군량미로 상주 진영으로 보내 군수품으로 쓰게 했다.

그 후 간재는 형 변희일과 함께 학봉이 있는 진주로 갔으나 이미 학봉이 전사했음을 알고 몸을 맡길 수 없음을 슬퍼하며 발길을 돌려, 망우당 곽재우 군중으로 투신했다. 이곳에서 간재는 적의 탄환에 맞아 팔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간재는 창녕 화왕산으로 달려가 박수춘, 성안의, 남사명, 류복기, 정사성 등과 함께 적을 물리치기로 맹약했는데,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화왕동맹록’은 전한다.

왜란이 평정된 후 사람들은 간재의 효행과 충절을 나라에 알리려 했으나 간재는 내세울 일이 아니라며 극구 만류했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참봉에 제수했으나 사양했다.

간재 별세 후 숙종 12년(1686)에 왕이 그의 충성과 효행을 기려 정려를 하사하고 지금의 금계리에 정충효각을 세웠다.

간재는 만년에 고향 집의 동쪽 언덕에 정자를 지은 뒤 ‘간재(簡齋)’라는 편액을 달고 그것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몸과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대쪽인생을 살겠다는 간재의 뜻을 알 수 있다.



△가문의 경로효친 정신 이어온 가풍

간재 11대 종손 변성렬(57)씨와 종부 주영숙(55) 여사는 간재종택을 지키고 있다. 종손은 현재 한국감정원 상무이사로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다. 영종회 교육학술분과 간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종손은 주말에는 종택에 올라와 종부의 일을 돕는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종부는 주호영 국회의원의 여동생이다. 종택의 모든 일들을 도맡으면서 종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집안에는 ‘열친회’라는 가문 화합 모임이 매년 이어져 오고 있다. ‘마음을 다해 친목을 도모하라’는 의미로 종손의 부친이 별세(1994년)하기 전에 ‘가문 화합 모임’ 전통이 사라질까 우려해 이름을 지어주었다. 매년 8월에 종손 11남매(2남 9녀)의 가족과 종손의 사촌 및 외가 가족 등이 모인다.

모임에는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학봉 종가, 경당 종가, 단계 종가 등 다른 종가의 종손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을 초청해 개고기·염소고기 찜과 탕 등 여름보양식을 대접한다. 간재종가의 이 같은 행사는 간재 변중일의 각별한 효친(孝親)과 경로(敬老) 정신을 잇는 일이다.

이 종가는 추석날 가족들이 모여 고택에서 달맞이하는 모습이 뉴스에 방송돼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간재종택 입구 홍살문
간재가 말년에 강학하며 수양했던 간재정.
간재종택 앞 연못에 세워진 ‘금학정’
1686년 간재선생의 충절과 효행을 기려 내려진 ‘정충효각’
간재종택 사랑채
‘충효고가’ 앞에 선 간재 11대 변성렬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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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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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