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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늘은 공간(空間)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대면하는 것이 공간입니다. 공간을 가지면서 비로소 우리네 인생은 시작됩니다. 아쉽게도 제가 눈뜨고 처음 본 공간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서너 살 이후의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가뭄에 콩 나듯,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들은 놀랄 만큼 강한 인상을 줬던 것들입니다. 서너 살 때 기차를 처음 타고 역 구내에서 마주쳤던 현란한 철길의 마법 같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제가 탄 기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땅바닥에 깔린 철로들이 마구 춤을 췄습니다. 그때의 공간 충격이 꽤 오래갔습니다. 얼마 전, 배를 타고 홀로 바깥나들이를 나섰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갑판에 서서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두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피니 배가 조금씩 후진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각하는 공간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문득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가상현실, 삶의 덧없음, 존재의 외로움 같은 것들과 관련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익숙하고 편한 공간을 떠나 불편하고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늙은 나그네의 심정이 그렇게 반영되었던 모양입니다.

나이 들어서 만난 공간의 신선한 충격 중에서는 성모당과 갓바위를 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두 곳은 영남 지역의 손꼽는 두 기도처입니다. 신심이 두터운 분들에게는 불경스런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겐 이 두 공간이 일종의 이음동의어, ‘쌍둥이 공간’으로 보였습니다. 겉모습만 다를 뿐 속 내용은 똑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간절한 기구(祈求)가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기도처로서의 공간 아우라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공간을 그렇게 완벽하게, 장엄하게, 활용하는 예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신성을 표방하는 거룩한 인위적 외형과 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의 겸허한 내면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 만들어내는 위대한 공간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 장엄한 풍경 속의 한 입자가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천상은 그렇게 모두의 합심으로 지상에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번 바깥나들이는 일본의 시모노세키가 그 행선지였습니다. 우리의 근대는 ‘관부연락선’과 함께 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공간을 이어주던 관부연락선, 그 시발과 종착의 표정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좋은 공간 체험이었습니다.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시모노세키 아카마(赤間) 신궁 앞에는 호수 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부두 끝자리에 큰 닻이 하나 설치되어 있습니다. 땅 위에 닻을 매단 것이 무슨 까닭인가? 궁금증이 일어 그 일대의 고사(古事)를 탐문했습니다. 결론은 ‘이 신궁 일대를 배로 봐 달라’는 취지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 ‘공간 활용법’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산 전체를 기단(基壇)으로 삼아 삼 층 석탑을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 지역이 배와 같은 모양이라(풍기가 문란하니) 어디 어디에 보(補)를 해서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많이 전해옵니다. 어쨌든, 땅 위에 닻을 매단 그 공간에 대한 도발적이고 적극적인 해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카마 신궁의 주인인, 전쟁에 져 수장(水葬)된 어린 일왕의 고사와 관련지어 생각해 보니 ‘함부로 애틋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것 아니더라도, 인생은 항해이고, 바다는 모태이고, 나그네는 외롭고… 이런저런 회포가 그 발칙한 공간 활용법 앞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구 들락날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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