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꼿꼿한 선비정신이 그립다’는 사람들이 많다. 자리를 탐하고 출세가 지상의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요즈음 세태에 학문과 윤리로 무장한 옛 선비들의 대쪽같은 정신은 청풍명월처럼 맑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조선조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두 거목은 서로가 대비되는 선비의 길을 걸었다. 퇴계와 남명은 연산군 7년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당시로는 장수했다. 경북 예안 출신인 퇴계는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였으며, 경남 삼가 출신 남명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였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으로서 한 정파를 이뤘으나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분파됐다. 퇴계는 34세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사직상소를 거듭 올려 상경과 낙향을 거듭하면서 대사성, 대제학 등 청직의 최고직과 각조 판서를 고루 역임,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진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 퇴계는 출사의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벼슬길을 거부하고 재야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 지속적인 국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재야의 우국지사로서 비판자 역할을 지키며 평생 초야에 은거한 남명은 “선비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 하나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에게도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군왕의 엄한 명령이 있을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응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벼슬에는 때가 있다”는 생각은 퇴계나 남명이나 둘 다 같았다. 퇴계는 벼슬길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사직상소를 수없이 올렸을 정도로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퇴계가 사림의 정계진출에 교두보를 놓은 반면, 강렬한 비판의식의 남명은 굳센 기상의 재야 사림으로서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 손학규고문이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 물러날 수가 없다”며 사실상 정계복귀를 시사했다. 하지만 정계 은퇴의 초심을 지키는 재야 거목으로 뿌리내리는 것도 값지다. 선비의 기백을 잃지 않은 ‘남명의 길’을 깊이 생각해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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