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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시인
다큐멘터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극적인 허구성 없이 사실대로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를 말한다. 사실이란 뜻을 가진 팩트(fact)는 은연중 신뢰감을 안겨 준다. 물론 그것이 진실이냐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 상상력이 배제된 자체만으로 진짜처럼 포장돼 믿음을 갖게끔 만든다.

논픽션이 유기농 식품이라면 픽션은 감미료를 곁들인 가공품. 마음의 거울에 비친 눈으로 사물을 관조하는 작가로서 다큐 프로에 천착함은 아이러니다. 응당 역사소설보다는 실록이나 정사의 기록에 흥미를 갖는다. 장황한 미사여구가 아닌 간결한 리얼리티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EBS 프로 ‘천국의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삶을 영위하는 청춘들의 이야기. 그저 눈물겹다. 미력의 손길을 내밀고픈 측은지심이 절로 솟아난다. 다큐는 우담바라 같은 희망을 꽃피우나 현실은 여의치 않으리라.

유년 시절 길거리서 목격했던 한국의 넝마주이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환생한 듯했다. 십대 소녀가 남동생, 엄마와 더불어 밤이면 쓰레기를 줍고 낮엔 학교를 다닌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며 친구들은 싫어하고,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일하여 보름 동안 생활비 7만 원을 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들의 아버지다. 온종일 빈둥대거나 불콰한 낮술에 절어서 가족을 보살핌엔 관심조차 없다. 심지어 학교도 가지 말라고 호통질. 애들한테 용돈을 타는 모습은 앵벌이 내지는 왕초의 판박이다. 한 가정을 책임진 꼰대가 어쩌면 저럴 수 있는지 분노가 치민다.

한때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짐 크로우 법으로 상징되는 흑백 분리로 오랜 세월 야만을 겪었다. 대명천지 20세기 중반이 돼서야 수정헌법에 의한 평등권을 얻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종교의 탄압을 피해서 신대륙을 찾아온 이민자 국가라 더욱 그렇다.

버지니아 대학 교수인 허쉬의 초등생 교과서는 노예 제도를 상세히 서술한다. 책 전체를 통틀어 언급되는 소설이 한 권 있다. 바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다. 남북 전쟁의 원인이 될 정도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말한다. 미국을 들썩인 여섯 권의 서적에 포함된 유일한 픽션.

백악관을 방문한 스토 부인에게 링컨 대통령은 인사했다. ‘엄청난 전쟁을 유발케 한 그 책을 쓰신 분이군요.’ 별도의 소단원으로 기술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제의 이념적 모순과 그것을 용인하는 부도덕성을 까발리는 외침.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특별한 감회로 다가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세월의 바람을 마주함은 여행의 또 다른 묘미가 아닐까. 멀리 워싱턴기념탑의 오벨리스크가 우뚝한 링컨기념관을 거닐 때도 그랬다.

인종의 전시장처럼 다양한 피부색의 관광객, 특히 흑인들을 보면서 ‘마틴 루터 킹’ 박사가 연상됐다. 몽고메리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을 주도해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젊은이. 당시 여기서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로 20만 명이 넘는 시위자를 감동시켰다.

미국의 공화당이 북한을 노예국가(slave state)로 규정했다고 한다. 이는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남북전쟁, 그리고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도도한 공민권 운동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된 그늘이 있기에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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