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유일 위안부 피해 생존자 박필근 할머니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경북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박필근 할머니가 집앞 고욤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7일, 포항시 북구 환호공원에 경북 두 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제막식이 열리던 날. 300여명의 참석자 가운데 그녀가 있었다.

다소곳이 의자에 앉은 황동빛 소녀상 옆에 그녀도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앉았다.

단발머리 소녀상의 또래였을 그 때, 아직 아빠와 엄마와 언니와 오빠들 틈에서 한참 응석을 부려도 좋았을 막내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억센 손에 끌려갔다.

겨우 열여섯 살이던 소녀는 올해로 여든아홉이 됐다.

박필근.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경북에서 살아있는 이는 할머니가 유일하다.



위로 오빠가 넷, 언니가 다섯인 막둥이였다.

1920년대의 죽장면. 너나 할 것 없이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제법 넉넉한 세간이었다고 할머니는 기억했다.

“우리 어메 아부지요? 잘 살았니더. 노루캉 멧돼지캉 농사진 거 다 쫘묵어도 이 짝에 농사 마이 지었니더. 방도 많고 헛간도 있고 마굿간도 있고 그랬니도. 머슴도 둘이나 부렸니더.”

헐리고 빈 터만 남았지만 고향집은 지금 살고 있는 곳 바로 지척이었다.

목가의 서정은 거기서 멈췄다.

“어른들 다 논밭에 일하러 갔을 때 와서 잡아갔니더. 누가 집 앞으로 와가 억지로 차를 태았는데 어디가는지도 몰랐니도. 누가 델꼬 가는지, 군복인지 양복인지도 모르니더. 16살 때 쪼매냈는데…”

위안부로 끌려가 당했던 고초를 할머니는 도통 꺼내려 하지 않았다.

몇 마디 말을 꺼내기 위해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더듬는 일 자체가 고초였다.

어디였는지, 몇 달이었는지 아니면 몇 년이었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바짓단을 접어올려 무릎 아래 정강이의 상처를 꺼내 보였다.

“도망쳐 나오다가 붙잡혀서 뼈가 뿌러질 정도로 맞았니도. 걷지도 몬했고 일어서지도 몬했니도.”

앙상한 다리에 가로로 깊게 패인 흉터가 여럿, 양 무릎 마디에 덕지덕지 붙인 파스가 모질고 악랄했던 시간을 대신 증언했다.

“그래도 또 도망쳤니도. 죽으면 죽꼬 살면 살고, 여기서 이래 죽으나 잡혀서 맞아 죽으나 똑같다 싶어가꼬…어디가 대구인동 부산인동 포항인동 안강인동 촌에서 자라가지고 모리고. 시골집에 들어가 재워달라카니까 멕여주고 신발도 사주고 그러디도.”

길고 긴 귀향이었다.

해방 후였는지 해방 전이었는지, 몇 달이 걸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배와 경운기를 얻어타고 자그마한 몸피의 소녀가 울며 돌아오던 그 밤을 겨우 떠올릴 따름이었다.



동네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하고 딸을 얻었다.

단란했다 일러도 좋을 세월은 잠깐이었다.

맏딸과 10살 터울의 아들을 유복자로 남기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서른 여섯의 일이었다.

다시 신산스런 나날이었다.

남의 집 방을 얻어 더부살이를 해야했고, 남의 집 농삿일을 도와주고 받은 품삯으로 두 남매를 키워야 했다.

“딸내미는 저쪽 기북면 사는데 요새 몸이 안 좋니더. 아들은 요만할 때 학교 그만두고 대구로 가가 아직도 저래 살고 있니더. 지들도 고생했고 나도 고생했니도.”

그 딸과 아들이 결혼을 해 낳은 딸과 아들이 다시 결혼을 해 자식들을 낳았다.

증손까지 이어진 가계도를 자부해도 좋으련만 할머니는 혹여나 가족에게 흠이 될까 극히 조심스럽다.

얼마전 대구에서 있었던 손자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안 갔니더. 지 엄매 아베 있는데 다 죽어가는 내가 뭐하러 가능교. 남사스럽게 구경시킬 일 있는교.”

어머니와 아버지는 진작에 돌아가셨고, 오빠 넷과 다섯 언니도 세상을 등진 지 오래전 일이었다.



할머니는 죽장면 월평리의 흙으로 벽한 집에서 홀로 산다.

돌담은 군데군데 무너져내렸고, 슬레이트 지붕에는 더께가 앉았다.

집 주변 텃밭에는 소일거리 삼아 옥수수·콩·깨 따위를 키운다.

곳곳에는 땔감으로 쓰일 장작이 가지런하다.

할머니의 동선은 짧다.

아들이 사다준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집 안팎과 텃밭을 다니고 근처 노인회관에 나가는 정도다.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이즈음은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 고욤나무 아래 평상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그늘을 오롯이 품고 만듦새가 좋은 평상은 사위의 솜씨라고.

할머니는 젓가락만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이 나무가 내 어릴 때 요만한 걸 심은 긴데 이래 컸니더. 내랑 같이 늙어가니도.”

아름드리 고욤나무에 기대 할머니는 같이 늙어간다는 말을 여러번 되뇐다.

고욤나무의 갈라진 수피처럼 세월은 할머니의 육신에도 깊은 골짜기를 새겼지만 아직 더러 외롭다.

아들 내외나 딸, 사위도 그리 자주 오진 못한다.

일주일에 한 번 반찬을 가져다주는 죽장면민복지회관 봉사자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죽장면사무소 직원 정도가 할머니가 만나는 바깥 사람들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화투를 친다.

혼자 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로 할머니는 화투를 친다.

외롭거나 심심할 때, 잠이 오지 않거나 일거리가 없을 때 할머니는 담요에 화투패를 펼친다.

자정까지 뒤척이다 얼마간 잠들었다 일어난 한새벽에도 화투패를 펼친다.

가끔 이웃이 찾아오면 화투를 내밀기도 하고 간간이 노인회관엘 들러 화투 칠 이를 찾기도 한다.

“치매 안 걸릴라카믄 이게 좋니더.”

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버린 채 끝내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하고 세상을 져버렸음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그 덕인지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또렷했고 건강했다.



“모르니더.”

할머니는 모른다는 말을 자주했다.

시골에 있어서 모르고, 기억이 안나서 모르고, 위안부 협상같은 것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할머니의 바람은 분명했다.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내는 돈이라도 받야되니더. 인제 죽을 날만 바라고 있는데 사과하는 놈 하나 없니더. 어떤 놈이 내한테 사과하능교. 돈도 받아가 지들끼리 나눠쓰지 우리한테 줄꺼 같능교. 몇 백살을 살 것도 아닌데…”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체념이 뒤섞여 거칠고도 무력했다.

박필근 할머니는 몇 해전 역시 같은 위안부 피해자 두 명과 같이 보냈던 하룻밤을 또렷이 기억했다.

박필근 할머니가 고욤나무 아래서 쉬고 있다. 넓은 그늘 아래 들어선 평상은 솜씨좋은 사위가 만들었다고 한다.
“포항여성회에서 델꼬 가가 위안부 할머니들이랑 여관에서 하루 잤니더. 인사하고 고생한 거 얘기하고 그랬지. 하나는 대구서 왔고, 하나는 포항에 있었다 캤는데 둘 다 내보다 나이 많았니더. 이제 다 죽었다디더. 텔레비전에 나오대. 죽었다꼬.”

2016년 7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한 이는 40명이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정부는 합의를 맺고‘화해·치유재단’ 설립을 추진해왔다.

이어 지난 10일 열린 한·일 국장급 회담에서 이 재단의 출연금 10억엔(107억원)의 사용 방향 등이 사실상 합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명예, 존엄, 회복, 상처, 치유같은 단어들은 또 다시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박필근 할머니는 기자가 햇볕 아래 설 때마다 ‘뜨겁다’며 그늘로 들어오라고 내내 성화였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울며 집으로 돌아오던 소녀의 밤과 아직 홀로 화투를 치는 그 밤이 자꾸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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