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신념으로 온몸을 불살라 빛나는 승리 거둔 의병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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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시 가은읍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 의충사에 모셔진 초상화.

‘탄환이여 자못 무정하여라/복사뼈만 상하게 하단말가/신복을 꿰뚫었던들 욕됨이나 없을 것을’(적탄을 맞고)

‘일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바 없거늘/ 죽음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구하랴만/ 오랑케 쳐부수길 다시 하기 어렵구나/ 이몸 비록 간다해도 넋마저 사라지랴’(옥중에서)

‘우리나라 이천만 민족이 장차 나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하도다’(형장에서)

이는 한말 의병전쟁사에서 탁월한 지도력과 용맹심으로 일제의 조선반도 침탈에 막대한 타격과 손실을 주었던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이 최후의 순간을 맞으면 뇌아린 짧막한 한마디다.

일제침략기와 강점기에 이르러 반세기동안 나타나는 문경의 인물과 사건을 추적, 발굴조사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재조명에 15여년 동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문경시청 황용건 주무관은 “운강은 항일의병전쟁사에 문경을 비롯 경북북부지역, 충북·경기도 등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따라 13년동안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구하려는 일념에 자신을 불사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지난1962년 운강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했으며,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은 현재 25명 정도이며, 의병운동으로는 운강과 더불어 허위,최익현 등에게 추서됐다.

운강선생은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은거해 학문에만 열중했었다. 운강이 격동의 역사 무대에 나선 첫 번째 계기는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이어지는 일제에 의한 국가 변란의 소용돌이였다.

이러한 국난에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기위한 일념에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 군사를 모집 1896년2월23일 가은 도태장터에서 척왜양이(斥倭洋夷)의 깃발을 올리고 왜적의 앞잡이며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해 문경 농암시장에서 이들의 반역행위와 토색질한 죄상을 낱낱이 들추며 효수했다. 이 때 농민군으로 활약하며 심산유곡을 누렸던 많은 농민들이 휘하에 들어와 의병항쟁에 크게 기여했다.

자기 수양과 학문연구에 몰두한 운강은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선생의 친필로 남아있는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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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에 있는 동상.


운강은 이항로 유인석계 위정척사학파로 학통을 세웠으며 위정척사를 정도로 춘추대의에 서서 기병했다. 즉 운강은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여 항일의병전쟁을 장렬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운강 의병부대 전투는 1907년 5월부터 제천·충주· 단양을 중심으로 경북 문경·영주 ·봉화,강원도 영월 ·태백·강릉, 경기도 가평 등 태백산과 소백산·설악산과 화악산 줄기를 따라 광범한 지역에서 전개된 일본 군경과의 대유격전이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ㆍ오경묵ㆍ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광무황제(고종)는 운강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했다.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 진중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어서 풍기 도촌에서 일제 앞잡이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하여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하고 투구 등을 노획했다.

문경 갈평에서는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 요성에서 일본군 육군소좌 과전삼태랑과 대도촌에서는 육군 보병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이어 대승사에서 다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했으나 8일에는 후군장 신태원이 문경 적성에서 참패하여 아군 16명이 순국했다.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ㆍ영월ㆍ병두ㆍ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했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했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정언 김상한, 전군장 윤기영, 소모장 주광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적 수십명을,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수십명을,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수 명을 사로잡는 등 연이어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다시 불리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수십명을 사로잡는 등 분전했던 선생은 그 간의 과로로 병을 얻어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며 탄식한 운강 선생은 부하장병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1908년에 접어들자 운강 선생은 휘하 장병들을 독려하여 동년 2월 용소동에서 적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 대청리, 갈기동에서 적과 교전했다.

1908년에 이강년 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 백담사의 전투와 4월 봉화 서벽·내성·재산 전투를 들 수 있다.

또한, 선생은 신돌석 의병장 같은 평민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할 만큼 민중의 이해를 잘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에 접근해 있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위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문도로서 유림ㆍ선비들과의 교분, 광무황제의 도체찰사 위임, 전투중에서도 군사들을 교련시키는 등 선생 자신의 뛰어난 용병술, 아들 3형제를 모두 의진에 참여케 한 헌신성 등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케 하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 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1908년 7월2일 청풍 작성산 전투에서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어 7월8일 서울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됐고,19일에 다시 평리원으로 이송돼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9월23일 사형언도를 받고, 같은해 10월13일 오전10시 51세의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운강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 사형수1호로 기록돼 있다.

이곳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는 그의 아들 승재와 종재 강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와 일본경찰의 동태보고서,순국한 허위,이인영,남상욱 의병장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운강은 순국하기 전 아들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 및 전국의 의병들에게

“너의 아비는 평생 혈충(血忠)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들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 안으로 박장(薄葬)토록하라....”

“강년(康秊)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丙申年(1896년) 이래로, 13년간 두 번의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화진(會戰)에서 적추(敵酋) 백여명을 참수하였다. (중략) 이 몸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大義)에 죽는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 되었다. (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賊勢)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라는 고결문(告訣文)을 남겼다.

우리나라 유일의 전쟁사 종합박물관인 용산 전쟁기념관 2층에는 일제침략기 일본군에 맞서 싸운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의 흉상이 영덕출신 평민의병장 신돌석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정부와 문경시는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선생의 항일투쟁의 숭고한 위업을 재조명하고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애국애족의 국민정신을 고취하고 수려한 자연경관과 연계한 21세기 관광문경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지난 2002년 4월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1683에 운강이강년선생기념관을 건립했다.

황진호 기자
황진호 기자 hjh@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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