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크리스마스 전날, 거룩한 밤이었어요 차에 치인 고라니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죄가 없었어요 축제에 빠진 도시에서는 추위에 곱아든 그림자가 이빨을 다닥거리며 잠들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어요 주인에게서 버려진 개 한 마리가 정육점 문틈에 어린 피 냄새를 맡고 킁킁거렸어요 낡은 태엽을 감는 소리가 골목 어디선가 새어 나왔어요 가로등이 하릴없이 벽을 핥는 소리 같기도 했어요 따뜻한 온기를 찾지 못하고 그림자와 개가 서로를 곁눈질하고 있었어요 마지막 숨을 내쉬기라도 하는 듯 고라니의 말간 눈동자 속에서 거룩한 밤이 파르르 떨고 있었어요

<감상>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물체를 쿵 넘었을 때 그게 버려진 비닐뭉치라서 안심한 적 있다. 오래 지나고서야 알았다. 그 비닐 안에 개미나 나방 같은 것들 모여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 고라니를 인형으로 보는 것이나 인형을 고라니로 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음을.(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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