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한 변호사.jpg
▲ 강정한 변호사
영국에서 브렉시트(Brexit) 찬반 투표가 있기 얼마 전,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 헌법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위 개정안은 77:23 정도로 부결되었으나,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뉴스에 나타나 처음으로 우리 국민의 주목을 모은 계기가 되었다. 에리히 프롬이 유명한 그의 글 ‘소유냐 존재냐(To be or To have)’에서 연간보증수입(Guaranteed Yearly Income)이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덟 가지 조건 중의 하나임을 밝힌 것이 이미 반세기 전이다. 이 ‘연간보증수입’의 동의어로 간주되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Basic Income)이다. “모든 사람이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굶주림으로부터 보호받으며, 거처도 제공받는다.” 에리히 프롬은 초기 기독교가 꿈꾸었으며 현재도 원시 부족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이 ‘사회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느냐에 무관하게 “살기 위한 무조건적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외친다. 그것이 관객 민주주의를 극복할 참여민주주의의 출발점이라고 외친다. 그는 우리들이 우리의 애완동물에게는 인정하면서도 같은 인간에게는 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며 우리들을 꾸짖고 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생활비를 준다는 건 공정하지 않으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늘 것이고 세금이 폭증할 것이라는 등의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에리히 프롬도 ‘사람들은 본래 기본적으로 나태하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와 같은 제도가 불가능하고 위험한 일로 생각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것은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지 못한 슬로건에 불과할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펄벅(Peral S. Buck)여사는 “역사는 인간 생활의 위험과 곤란이 최소한도로 감소되어진 곳에서만 민주주의가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스위스 기본소득제 논의의 출발점이 자타공인의 세계1위의 복지제도가 가지는 비효율성 등을 고려하면 사회복지를 줄이고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유용하다는 논리에 주로 의존하는 것처럼 보도되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이미 반세기전부터 사회복지제도와 무관하게 기본소득제도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논의가 확대되어 있다.

중요한 화두는 기본소득제가 국가는 물론 다른 인간(예컨대, 부모나 배우자, 고용주)으로부터의 개인의 자유의 영역 확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이다, 이를 통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 기회 확대,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이 다수(투표자)가 소수(선출된 자)에 의해 지배를 받는 꼴이 되고 만(‘국가’가 하는 일을 ‘국민’이 반대하여서는 안 된다거나 ‘정부’의 성공이 ‘국가’의 성공이라는 말로 포장된) 현대 민주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핵심적인 방안이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국회의 입법조사처는 지난 4월 처음으로 “기본소득 도입 논의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우리 국민의 과반 이상도 양극화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없앨 수 있으며 사회불안요소를 줄일 수 있고 개개인의 삶에 여유가 생길 것이라는 등의 생각에서 이 제도의 도입을 찬성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법률에 의한 국가권력의 제한이라는 법치주의의 참뜻이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소리치는 것으로 왜곡되어 강요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정치적 민주주의가 수십 년 전으로 퇴행하였다는 국내외의 평가를 받는 지금 우리에게, 기본소득 논의는 시기상조(時機尙早)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대상이 된 것 아닐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