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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언제부턴가 우리는 관음증(觀淫症·voyeurism)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남모르게 남의 치부를 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 되는 세상에서 삽니다. ‘남모르게 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대상의 치부를 노리기 때문에 그 자체로 파괴적이고 공격적입니다. 당연히, 유희나 취미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공동체 생활을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악행이 될 때가 많습니다. 유희나 취미는 물론이고 보복이든, 폭로든, 돈벌이의 수단이든, 그것이 남기는 ‘짧은 쾌감, 긴 부작용’은 두고두고 우리 사회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으로 인해 흐트러진 공동체의 윤리감각을 회복하는데 큰 대가와 오랜 시간이 요구됩니다. 때로는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의 추세를 보면 우리 사회의 관음증 상태는 아주 심각합니다. 시각 문명, 천민자본주의와 함께하면서 우리 사회의 관음증 문화가 어느덧 주류 코드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고 있습니다.

관음증 문화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곳이 바로 학교입니다. 근자에 ‘인성교육’이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수업 과정에 반드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인성교육’을 포함토록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교수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습니다. 그러니만큼 너도나도 ‘인성교육’을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인성교육’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노력의 배후에는 요즘 학생들의 인성에 대한 우리 기성세대들의 염려와 걱정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른들이 볼 때 이미 아이들의 인성에 문제가 많이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기성세대들의 공통적인 우려가 ‘인성교육의 강조’라는 교육 당국의 정책 방향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인성교육’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범하는 각종 비리와 일탈 속에서 자랍니다. 관음증과 관련된 어른들의 비행(非行)도 낱낱이 보고 자랍니다. 정계·관계·재계 할 것 없이 기성의 권위나 규칙을 대표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세상에서, ‘너희는 규칙을 준수하고 남을 배려하며 어디서든 깨끗하게 살아라’라는 교사들의 권유가 먹힐 리가 없습니다. ‘좋은 경험이 인간을 만든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만, 아이들은 자기가 보고 겪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만들어 갑니다. 인생을 웬만큼 살아본 제가 봐도 낯 뜨거운 장면이 하루가 멀다고 TV 화면에 등장하는데 아이들만이 어떻게 독야청청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지의 문명은 세계를 알몸의 육체로 바꾸고 그 육체를 이미지의 형태로 소유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가 과거의 세계와 다른 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지 못했던, 사회관계와 소유관계에서 발생한 중대한 변화입니다. 시각 문명의 총아인 카메라는 세계를 이미지로 바꾸어 소유와 분배의 평등을 실현합니다. 모든 눈 가진 자는 볼 수 있고 볼 수 있으면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앞에서 만인은 평등합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눈입니다. 눈이 원하지 않는 것은 손도 대지 않습니다. 손은 더 이상 순수 촉각이 아니라 ‘눈 달린 촉각’이 되고자 합니다(‘밀어서 잠금 해제’, 스마트폰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이렇듯 시각쾌락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관음증은 ‘물 만난’ 독버섯처럼 화려하게 그 날개를 폅니다. 쾌락을 넘어 빠르게 권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자동조절장치로는 이미 속수무책입니다. 부디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인성교육을 위해서라도 이 불패의 관음증에 대한 특단의 수동(手動)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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