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제일루에 앉아 푸른 동해 바라보니 정철의 감탄사 귓가에 들리는 듯

망양정
해수욕장이 폐장된 지 겨우 닷새가 지났을 뿐인데 망양정해수욕장은 철지난 바닷가다. 백사장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여백만 가득하데 여백의 한쪽을 갈매기들이 채우고 있어 그나마 화면의 균형이 잡혔다. 바다 풍경이 이렇듯 한산해지자 밀려오는 파도도 소리만 요란할 뿐 박제된 정물에 불과하다.

이제 막 철이 지나 별 볼일 없어진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망양정으로 가는 계단길을 오른다. 계단 길 역시 오가는 이 없이 한산하다. 녹음방초도 붉은 꽃도 강렬한 태양아래 끝물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계단 길 끝에 망양정이 있다. 낮은 곳에서 처마를 올려다 보니 정자는 한 마리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한 느낌이다. 어제 보다 더 높아진 하늘에는 새털 구름 가득하고 정자 기둥 너머로 푸른 바다가 하늘과 맞닿아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수평선 근처에는 고기잡이 배들이 가물가물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는 누각으로 만들어졌다. 누하주 사이로 난 계단을 통해 정자로 들어가는 형식이다. 정자 안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는 눈이 부시게 푸르다. 왼쪽으로는 왕피천이 바다와 합류하는 모습이 들어오고 강물의 합류를 환영하듯이 파도소리가 요란하다.정자 안은 누정기와 시문 8편이 걸려있다. 정철의 관동별곡과 숙종어제시 정조 어제시, 김시습의 시도 있다. 영의정으로 있다가 평해에 유배를 왔던 이산해의 시도 걸려있다.

망양정에서 본 왕피천과 망양정 앞바다


□국보급 예술가들의 시화 전시장 망양정

강원도 관찰사 시절 울진을 들렀던 정철은 망양루에 올라 푸른 바다를 보면서 시로 읊으면서 관동팔경의 대미를 장식했다.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망양정에 오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가뜩이나 성난 고래를 누가 놀라게 하였기에
불거니 뿜거니 하면서 어지럽게 구는 것인가. 마치 은산을 꺾어
온 세상에 흘러 내리는 듯,오월의 아득한 하늘에 백설은 무슨 일인가.


숙종도 망양정의 경승에 취해 직접 시를 썼다.

‘골짜기들 첩첩 둘러보고 구불구불 열렸고/ 놀란 파도 큰 물결 하늘에 닿았네/ 만약 이 바다를 술로 만들 수 있다면 / 어찌 다만 삼백 잔만 마시겠는가.’

정조도 시를 썼다. ‘태초의 기운 아득히 바다에 풀어지니 / 뉘라서 이곳에 망양정을 알 수 있으리 / 흡사 문선왕 공자의 집을 훑어보듯 / 종묘며 담장 하나하나 훑어본다’

숙종은 관동팔경 중에서도 망양정의 경치가 최고라 하여 ‘관동제일루’라는 현판까지 하사했다.

조선의 스타급 화가들도 앞다투어 그림을 그렸다.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열었던 겸재 정선도 망양정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관동명승첩’ 중 ‘망양정도’다. 그림 속 망양정은 수직의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넘실대는 파도는 절벽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정자를 집어삼킬 듯이 고압적이다. 정자 뒤 언덕에는 짙푸른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있다.

단원 김홍도도 망양정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 김홍도의 그림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파도는 섬세하고 섬처럼 떠 있는 산봉우리에 망양정이 서 있다. 안정감이 있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김홍도의 그림이 광각렌즈로 망양정을 둘러싼 주변 풍경을 폭 넓게 잡은 구도라면 정선은 자기가 강조하고 싶은 풍경을 망원렌즈로 당긴 것처럼 두 그림은 대조적이다.

□망양정의 불편한 진실

망양정은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61-1번지 언덕위에 있다. 동쪽으로는 망양정 해수욕장 푸른 바다가 가없이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왕피천이 흐르는 절경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망양정은 불행하게도 정철이 시를 읊고 겸재가 그림을 그렸던 그 망양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망양정에서 정철과 겸재를 떠올리며 옛 선비들의 정취를 느끼기는 난감하고 민망한 일이다.

최초의 망양정은 고려시대에 기성면 해안가에 세워졌다가 1471년 (성종 2년) 평해군수 채신보가 현종산 남쪽 기슭에 옮겼다. 1517년과 1590년에 두 차례 더 중수했으나 허물어졌으므로 1860년(철종 11년) 울진현령 이희호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다가 2005년 울진군이 완전해체한 뒤 새로 지었다.

그러므로 겸재와 김홍도가 그린 망양정은 현재의 망양정이 아니다. 숙종이 내린 ‘관동제일루’ 현판도 정철의 관동팔경도 김시습의 시도 지금의 망양정 풍경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노래한 망양정은 평해군수 채신보가 1471년 현종산 남쪽 기슭에 옮긴 그 정자였다.이런 연유에서인지 울진군은 지난해 망양정 옛터에 3억5천만원을 들어 정자를 짓고 유허비를 이전 설치했다. 1590년 평해군수 고경조가 중수한 지 425년 만의 일이다.

망양정 옛터의 주춧돌

□필생의 정적, 정철과 이산해의 만남

선조때 일이다. 이산해는 영의정, 정철은 좌의정, 류성룡은 우의정이었다. 이산해와 류성룡은 동인의 영수, 정철은 서인의 영수였다.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궁의 왕자를 세자로 세울 뜻이 없었던 선조는 노발대발해 정철을 파직하고 유배 보냈다. 이산해는 정철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했고 류성룡은 유배에서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동인은 다시 패가 갈려 이산해는 북인으로, 류성룡은 남인으로 분파했다.

▲ 김동완 자유기고가
1592년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영의정 이산해는 선조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이산해가 자신을 죽이려했던 일을 잊지 않았다. 왕의 측근들이 서울을 비운 죄를 물었다. 선조도 어쩔 수 없었다. 1593년 이산해는 54세에 평해로 유배를 왔다. 그는 평해에 있는 3년 동안 황여일, 곽진사 등 지역 명망가와 친분을 유지하며 망양정, 월송정에서 시를 남겼다. ‘아계유고’에 실린 840수의 시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평해 유배시절 지은 것이다.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평해를 찾아 망양정에서 시를 남겨 관동별곡의 대미를 장식한 지 꼭 12년 만이다. 숙명의 정치적 라이벌은 망양정에서 시로 다시 만난 것이다.

바다를 베고 누운 높은 정자 전망이 탁 트여
올라가 보면 가슴 속이 후련히 씻기지
긴 바람이 황혼의 달을 불어 올리면
황금 궁궐이 옥거울 속에 영롱하다네

- 이산해의 시 ‘망양정’

김동완 자유기고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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