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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28.영덕 무안박씨 무의공 종택

임란 공신의 애국애족·희생정신 대대로 실천하는 명문가

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등록일 2016년09월04일 19시29분  
▲ 무안박씨 무의공공파종택 전경.

2016년 4월 2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된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축산면 도곡1리 (속칭:번안계 )의 북쪽에 있다. 야산을 배산으로 안들을 내려다 보며 남향으로 배치 돼있는 조선시대 명문 양반가의 저택이다. 무의공 종택은 1644년 무의공 박의장(1555~1615)의 넷째아들 박선(1596~1669)이 맏형 박유를 위해 건립했다.

건물은 6칸 규모로 솟을대문과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입구자(口)자형의 정침이 배치돼 있고 정침 우측 후면에는 무의공 불천위 사당이 있다. 정침 오른쪽 전면에 사랑채가 자리를 잡고 있다. 중문의 오른쪽에는 작은 부엌 1칸과 2칸의 온돌이 있고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연이어져 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1칸을 돌출시키고 하부에는 기둥을 세워 누와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대청 주위의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했다. 주상에는 익공계로 분류할 수 있는 특이한 장식이다. 대량 위에 포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5량가다.

사랑마루 측면의 문틀에는 중간 설주를 세웠던 장부구멍이 상, 하틀에 남아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2통간의 안방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상방을 배치했다. 대청 상부 가구는 종량 위에 제형 판대공을 비교적 소박한 모습을 한 5량가 인데 대량을 박는 양봉에 초각장식을 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간의 좌측에 문간방, 부엌, 마구간이 달려있고 마구간 옆에는 화장실이 있고 대문채 우측에는 문간방, 창고를 놓았다. 창고 우측에는 독립된 화장실을 설치 했다. 사당은 정면3칸,측면2칸 규모의 초익공계 건물로 전면은 원주를 세웠으며 박공면 에는 풍판이 달려있다

덕후루무안박씨무의공공파제실.

임진왜란 공신 무의공 박의장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본관은 무안(務安), 시호 무의(武毅), 자는 사강(士剛)이며, 영해면 원구리 에서 아버지 세렴과 어머니 영양남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인인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577년(선조10년) 별시 무과에 급제했다. 1579년 훈련원 봉사을 시작으로 진해현감, 경주판관, 경주부윤 등 여러 관직을 거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충정도 수군절도사. 1614년 경상도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임진년(1592년:선조25년) 일본군 1번대 1만 8천여 명이 700척의 병선에 나눠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발해 부산포로 쳐들어 왔다. 이 전쟁이 7년으로 이어지는 임진왜란(1차 침략)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박의장은 경주판관으로 불리한 전황 속에 경주 산간지대 죽장에서 흩어진 관군과 의병을 모아 신무기(조총)를 제작해 1592년 9월 27일 영천성을 탈환했다. 경주성 탈환에는 경주 출신 군기시 화포장 이장손의 도움으로 ‘비격진천뢰’를 제작해 1.2차 걸쳐 전쟁을 치렀다. 이때 박의장은 관군과 의병군을 통합 지휘해 경주시에 주둔한 5천여 명의 왜군을 공격해 1592년 9월 7일 경주성도 탈환했다. 영천성, 경주성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이기에 피란 중인 선조도 이순신의 승첩에 버금가는 것으로 승전을 크게 기뻐 했다고 한다.

“적은 넋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당황하더니 이틑날 밤에 부산으로 도망쳐 갔다. 추격해 적 수십을 베고 그날로 성을 탈환했다. 성안에는 아직도 창고에 곡식이 4만 석이 있기 때문에 군사와 백성을 먹이는데 넉넉하다.

경주동도복성비.
제2차 경주성 탈환당시 묘사 ‘관감록’- 박의장 문집

또한 전란중 부친 별세, 동생(홍장) 사망 등 가족사에 문제보다 국가의 국난극복과 백성을 생각하는 목민관으로 의무를 다했다. 전란 후 당색 및 무반에 대한 평가문제 등으로 정공신에 들지 못하고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됐고, 문집으로 ‘관감록’을 남겼다.

박의장은 1784년 (정조8년) 무의공(武毅공) 으로 시호를 하사 받았고 시호가 내려진 뒤 영의정 번암(樊巖) 체제공(蔡濟恭)이 묘갈명을 지었다.

“하늘에는 액운이 있으니 운수가 이르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준걸스러운 인물을 낳아서 나라를 보호하게 하는 것이다. 공이 터트린 진천포가 벽력이 되어 울렸으니 적이 달아나고 아군이 들어감에 쌓여있는 쌀이 산과 같았다.”

위 내용을 병풍으로 제작해 음력 1월 25일 고위 불천위 제사에 사용하고 있다.

후손들 또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다. 11대손 재명은 을미사변 후 영해의병의 중군으로 일제에 항거했고, 12대손 우종은 의병활동 후 만주로 망명 독립 운동에 투신,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국가지정문화제 지정수여 14대 종부 김화자 74세.

노종부, 15대 종손

무의공파 14대 종부 김화자( 74세)는 안동 지례 국촌댁 집안에서 도곡리로 시집와서 지금 까지 종가를 지키고 있다. 시조부모 때 재산을 다 팔아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살림살이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남편 마저 50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4남매를 훌륭히 키웠고 종가도 지켜 냈다.

“주인양반 돌아가시고 이 집 하나 붙들고 자식 키우는 거에 인생을 걸고 살아 왔어요. 한 푼 이라도 내가 품팔이 했어 하루 나가고 일당을 벌어와 가지고 아들한테 잡비도 주고 공부 시켰는데 하다못해 장사도 하고 공사판에도 가고 못 하는 게 없이 다 했어요. 이를 물고 달라들끼네 못할 짓이 없더라꼬 그래서 나는 오직 하나 욕을 하던둥 뭘하던둥 나는 저 아들 공부 시키고 먹고 살아야겠다고 그 마음 하나 먹고 살았지…”

15대 종손 박연대(52세)는 2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종손을 계승한 지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과거와 같이 봉제사 접빈객을 우선해 종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의 생업 방식에 따라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서울에 살고 있으며, 약 3천여 점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종택의 문서, 유물 등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해 관리하고 있다.



가볼만 한곳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는 독을 구웠다고 해 독골, 짓골, 정신골, 또는 도곡이라 했다. 7번 국도 영덕에서 울진 방향 약 10분 정도 가면 축산 교차로가 나온다. 교차로에서 바로 내리면 야산 밑 높은 솟을대문의 무안박씨 무의공 종택이 보인다 .

구한말 평민의병장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장산 신돌석장군 생가 및 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전시한 기념관, 충의사, 동재, 서재 등으로 구성된 신돌석장군유적지, 동·남해안의 봉수 유적중 가장 크고 형태가 분명한 대소산(282m) 봉수대, 봄이면 감칠맛 나는 물가자미로 유명한 축산항, 뛰어난 주변 경관과 낚시터, 해저 산호 군락지의 발달로 스킨스쿠버 동호인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영덕 불루로드 B코스 최고의 절경지인 죽도산 유원지가 있고, 영덕대게의 진정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원조 대게원조마을(경정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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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동 기자

    • 최길동 기자
  • 영덕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