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가 1930년대 말 항일운동과 구금생활로 상한 몸을 이끌고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를 찾아온 것은 당시 그곳의 애국청년 김영호(金永浩·당시 35세)·정의호(鄭義昊·당시 37세)·이석진(李石振·당시 40세) 등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난 1995년 경북일보가 기획 취재한 ‘명작의 무대’ 취재 과정에서 당시 연하이면서도 육사와 이들의 모임을 지켜 본 김대근씨(金大根·취재 당시 82세·작고·포항시 북구 신흥동 338)의 회고였다.

김씨는 “당시 집안 형인 정의호를 따라 나루끝(현재 포항시 북구 학산동)에서 나룻배를 타고 영일만을 가로질러 도구리에 도착했는데 그 때는 이미 일본인들이 건설한 형산다리가 있었지만 운치를 느끼기 위해 배를 탔다. 이육사와 이들 일행은 도구리에 있던 미쯔와(三輪)포도농장에서 며칠 동안 은밀히 모여 포도주를 마시며 밀담을 나누는 것을 보았지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도구리의 미쯔와포도농장이 있던 곳은 지금은 해병대 1사단이 있는 곳으로 동해 바다가 보이는 구릉 위에는 온통 포도밭이었다.

김씨는 육사가 일경의 눈을 피해 포항으로 와서 우국청년들과 만나고 떠난 1년 뒤 미쯔와포도농장과 영일만이 ‘청포도’ 시를 탄생시켰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애석하게도 잃어버렸다고 했다. 육사가 지향했던 동경의 세계와 고달픈 몸을 이끌고 파란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식민시대 백성들의 꿈을 노래한 절창 ‘청포도’가 바로 영일만과 도구리의 포도농원이 소재가 됐던 것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 그대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의 마음에 시의 물살이 인 곳이 바로 포항 도구의 포도밭 이었다.

안동시가 이육사의 고향인 도산면 원천리 일대에 포도원을 조성하고 청포도와인까지 생산했다고 한다. 와인을 마시면서 청포도 시가 탄생한 배경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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