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자들 중에는 이사를 자주한 사람들이 많다. 사색을 방해하는 소음을 피해서였다. 18번이나 이사를 한 데카르트는 너무 많이 찾아오는 지인들로부터 피신을 위해 이사를 했다. 프레겔 강가의 집에 살던 칸트는 뱃고동 소리 때문에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집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아침 사색을 할 때 집 부근 양계장의 닭 울음 소리가 칸트를 괴롭혔다. 칸트는 또 이삿짐을 싸야 했다.

59세 때 마지막 이사를 한 성 근처의 집은 방 8개와 정원이 딸린 저택이었다. 하지만 그 곳도 편안하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난 칸트가 사색에 들 즈음에 인근에 있는 교도소에서 청소를 마친 죄수들이 합창하는 찬송가가 칸트의 사색을 방해했다. 칸트는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 죄수들의 찬송가를 금지하도록 민원을 제기했다.

경찰의 신고를 받은 시청 간부들은 장시간 논의한 끝에 아무리 유명한 철학자의 민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찬송가를 못 부르게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학문적인 자유로운 사색도 개인의 권리인 만큼 찬송가를 부를 땐 창문을 닫고 부르도록 했다. 가톨릭이 국교나 다름없어 종교적 행사에 시비가 용납되지 않던 당시 시 당국이 사색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계몽주의 풍조의 힘이 컸다.

니체도 주위 소음을 피해 이사를 다녔으며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외국의 조용한 요양지에 요양을 떠나기도 했다. 다세대주택 문화가 일찍 발달 한 유럽에서 층간의 소음으로 다툼이 많았다. 하숙집 옆방 부인들의 소란에 대한 논문까지 쓴 쇼펜하우어는 집 주인을 통해 소음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옆방 여자를 내동댕이쳐 법정에 섰다. 재판에서 벌금과 함께 해마다 피해자에게 일정한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총리 출신 7선 의원인 이해찬의원의 ‘퇴비민원’이 ‘황제민원’이란 비판과 함께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부시장까지 현장에 출동, 퇴비를 수거케 한 과잉대응이 논란거리였다. 농민의 노고와 마음을 헤아려주는 아량은 어디 갔나.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