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의 땅은 연나라가 공격하여 얻어

삼국유사는 위만조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한서’ ‘조선전’에 이른다. 연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眞番)조선(朝鮮)을 공략하여 얻었고, 거기에 관리를 두고 보루를 쌓게 하였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외곽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났다. 멀어서 지키기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盧?)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동쪽으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진번조선의 오랑캐들과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검을 도읍으로 삼았다. 병사로써 위협하고 침략하여, 이웃의 소읍들을 항복 받으니, 진번·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에 이르러, 진번·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우거가) 가로막아 통하지 못했다…(중략)

천자는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고, 그를 기습공격하여 죽였다. 천자가 누선장군 양복을 파견하여, 제나라 땅으로부터 (군함을) 발해에 띄우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 순체(荀?)가 요(遼) 땅으로 나가서 우거를 쳤다. 우거는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누선장군은 제나라출신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나가 치니 누선은 패하여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중으로 숨어서 면했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하략)

이후 왕검성에서 일어난 내란을 이용하여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임둔·낙랑·현도의 사군을 두었다는 한서의 기록을 인용한다.

위만조선은 사마천 사기(史記)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 책에는 한사군(漢四郡)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삼국유사의 몇 가지 주목할 여지가 있는 대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위만의 이름이 한자로 ‘魏滿’이다. 다른 사서에는 ‘衛滿’이다.

둘째, 위만조선의 땅은 이미 전국시대의 연나라가 공격하여 얻어 성을 쌓고 관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셋째, 진(秦)나라 시절에는 요동의 외곽으로 삼았는데, 공지로 두었다한다.

넷째, 한나라시절에는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으나,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였는데 조선과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다섯째, 연나라의 위만이 패수를 건너 들어와 차츰 세력을 확장하여 왕검성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한다.

여섯째, 위만의 손자 우거시대에 한나라와 충돌이 일어났는데, 한나라 수군은 제나라로부터 출발하여 발해로 쳐들어갔고 육군은 요(遼)로 출격했다. 여기의 원문이 ‘출요(出遼)’인데, ‘요로 나갔다’와 ‘요에서 출발했다’의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일곱째, 한나라의 수륙양군이 모두 전투에 패배하였고 위만조선의 내분에 의하여 겨우 이기고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한다.

이밖에 위만조선을 과연 우리 민족사의 주류로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는데, 다음 호에 상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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