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유흥시설' 오명에 가려진 신라 왕실 미학의 정수

포석정의 물굽이 길이는 22m 너비는 30cm 깊이는 22cm이다.
측정 이래 가장 높은 강도의 지진이 경주에서 발생했다. 두 차례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고 일주일 뒤 한 차례 더 여진이 몰아쳐 대한민국을 지진 공포에 떨게 했다. 지진은 경주 내남면 부지리 하곡저수지 인근에서 발생했다. 포석정에서 자동차로 불과 10분 떨어진 거리이다. 인근 지역이 가옥 파손 등 적잖은 피해를 입었으나 우려와는 달리 경주 남산 문화재들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포석정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경주 남산은 포석정, 삼릉, 용장계곡 코스를 품고 있는 서남산과 통일전, 칠불암 코스가 있는 동남산으로 나뉜다. 서남산 가운데 오릉네거리에서 삼릉까지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도로 주변은 신라 창업과 패망의 기록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곳이다. 신라의 개국왕인 박혁거세왕의 탄생지인 나정을 중심으로 북동쪽 500m에 신라의 첫 왕궁 창림사지가, 남쪽 500m에 박혁거세왕의 무덤인 오릉이 있다. 신라의 패망의 상징이 된 포석정과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던 신라 55대 경애왕의 무덤이 나정 북쪽 서남산 기슭, 삼릉 옆에 있다.

포석정은 전복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흐르는 물에 잔 띄우는 운치, 유상곡수연

포석정은 63토막의 화강암을 다듬어 구불구불하게 물길을 만들고 물길에 물을 흐르게 한 뒤 술잔을 띄우도록 한 석조구조물이다. 너비 30cm, 깊이 22cm, 길이 22m로 조립한 인공 물길이다. 이 물길에 술잔을 띄우면 대략 12곳에서 술잔이 머물게 되는데 술잔이 머물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술잔을 비우며 놀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이른 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유배거(술잔이 흐르는 거랑)이다.

유상곡수연의 원조는 중국 동진의 명필 왕희지다. 그는 353년 저장성 사오싱현의 후이치산 북쪽 난정(蘭亭)이라는 정자에서 명사 41명과 개울물에 몸을 씻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고 했다. 이때 읊은 시를 모아 만든 책이 ‘난정회기’이다. 난정회기의 서문인 ‘난정집서’는 왕희지가 썼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석정에서는 유상곡수연이 어떻게 펼쳐졌을까? 단서는 1974년 안압지에서 발견된 14면체 주사위 ‘주령구(酒令具)’에서 찾을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귀족들이 술자리 연회에서 가지고 놀았던 이 주사위는 뜻을 풀이하자면 ‘술을 마신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도구’다. 술을 마신 사람이 주사위를 굴려 한 면이 나타나면 그 면에 새겨진 문구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벌칙을 수행한다. 벌칙은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는 ‘금성작무(禁聲作舞)’, 술 석 잔을 한꺼번에 마시는 ‘삼잔일거’ 못된 짓을 해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유범공과’ 같은 14가지 벌칙을 수행하도록 돼 있는 데 당시로는 짓궂은 벌칙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다.


포석정 뜰에는 전복을 엎어놓은 듯한 바위가 여러개 놓여있다.

△전복을 닮은 정자, 포석정

포석정의 이름은 돌로 만든 물길이 전복을 닮았다는 뜻에서 전복 포(鮑)자를 써 이름 했다. 그런데 의도하고 그랬는지 본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포석정 뜰에는 전복이 엎드려 있는 형태의 바위 십여 개가 흩어져 있어 뜰에 들어서면 마치 전복이 떠다니는 바다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현재의 포석정, 거북을 닮은 물길은 그 자체로 정자는 아니다. 포석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고 그 부속 시설로 거북을 닮은 물길인 포석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포석정’은 ‘포석정터’나 ‘포석정지’로 하는 것이 맞지 않으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화랑세기’ 등에 여러 차례 나온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할 때 남산신이 나타났다.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왕이 따라 추었는데 이 춤은 ‘어무산신무(御舞山神舞)’ 또는 ‘어무상신무(御舞詳審舞)’다. 다른 이야기 하나. 효종랑이 포석정에서 화랑들을 불러 수련했다. 두 명의 화랑이 지각을 했다. 그들에게서 가난한 모녀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들었다. 효종랑과 화랑들이 쌀 100석을 보내고 그의 양친도 바지저고리 한 벌을 보냈다.

사적 1호 포석정은 비운의 역사현장이다. 신라는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견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사실상 패망했다. ‘삼국사기’는 전하는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경애왕 4년(927) 11월 견훤이 갑자기 왕경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비빈과 종친 외척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면서 놀았다. 적병이 들이닥치자 우왕좌왕하다가 왕과 왕비, 귀족들이 잡혔다. 견훤은 살려달라는 경애왕을 자살시키고 왕비는 강간했다. 비첩들은 부하들이 욕보이게 했다. ‘삼국사기’는 경애왕이 견훤의 침공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는데도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놀다가 견훤에게 죽었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취지로 기록하고 있다.


포석정 옆을 흐르는 개곡물. 유상곡수연 시작전에 몸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애왕 홀로 떠안은 불우한 유산

경애왕은 불우한 유산의 계승자였다. 나라는 벌써 후삼국시대에 접어들었고 신라가 통치할 수 있는 영토는 현재의 경주시 규모인 과거 서라벌 소국 영역에 머물렀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하정사로 당나라로 떠났다가 도적에게 길이 막혀 돌아올 정도로 국력이 쇠약했다. 경애왕의 아버지 53대 신덕왕 4년에 영묘사 안 행랑에 까치집이 34개나 되고 까마귀집이 40개나 됐다. 54대 형 경명왕 때는 신라의 대표적 호국사찰인 사천왕사의 벽화 속 개가 울었다. 또 황룡사 탑 그림자가 금모사지의 집 뜰 안에 한 달 동안 거꾸로 서서 비췄고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끊어졌으며 벽화 속의 개가 뜰로 달려 나왔다가 다시 벽의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한마디로 나라가 개판이었다.
포석정 건축물의 주춧돌로 보이는 석조물이 군데 군데 흩어져 있다.

경애왕은 즉위하자 말자 선왕 시절 ‘개 판을 친’ 황룡사에서 백좌를 열어 불경을 풀이했다. 선승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불공을 드리는(삼국유사) 등 나름대로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애를 썼다.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처님 원력 뿐이었다. 그러나 견훤의 침공으로 그는 처참하게 죽었고 무능한 군주의 상징이 됐다. 그가 죽은 자리, 포석정은 멸망의 아이콘이 됐다. 경애왕은 신라 멸망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 썼다.
포석정 가는길

위작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경애왕에 대한 ‘먹고 놀다 나라 말아먹은 왕’의 혐의가 벗겨지고 있다. 화랑세기는 포석정을 ‘포사(鮑祀)’, ‘포석사’로 기록하고 있다. 포석정이 사당의 기능을 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포석사에는 삼한 통합 후 사기(士氣)의 종주로 받들어 진 문노의 초상화를 모셨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결혼식을 한 곳이다. 국가 제사를 지낸 뒤 음복을 하거나 혼례와 같은 좋은 일의 피로연 장소로 활용됐을 것이다. 포석사 내에 포석시설과 관련 있는 정자가 포석정일 가능성이 있다. 포석정은 화랑의 훈련장으로도 쓰였고 왕이 신라의 성지인 남산신을 만나는 장소였으며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고 사학자 이종욱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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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 김동완 자유기고가
경애왕의 경우도 그렇다. 견훤이 나라를 침범해 영천 부근에 와 있는 상태, 왕건에게 원병을 청해 놓고 있는 처지에 왕궁을 비우고 대신들을 포석정으로 불러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특히 이때 음력 11월, 한 겨울에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논다는 게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미치지 않고는 왕이 적병이 코앞에 있는 누란의 위기에서 한겨울에 물가에서 술잔을 돌리며 놀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는 포석정에 대한 ‘망국의 유흥시설’이란 오명을 벗겨주고 경애왕에 대해서도 술 마시다 나라 말아 먹은 왕이라는 혐의도 벗겨줘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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