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말랐네)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사나이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불러 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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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전 검찰총장

조선 최고의 비극적 인물 중 한 사람인 남이는 조국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5대손으로 할머니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고, 장인은 대학자인 권근의 손자로 정난 및 좌익공신 1등에 책봉된 권남(權擥)이다. 남이는 약관 16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당대의 명문가 자제인 그가 문신에 비해 훨씬 낮은 대우를 받았던 무인의 길을 택한 까닭은 정확히 알기 어렵다. 비록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의 혁혁한 전공(戰功)과 출세에 비춰 볼 때 무인 쪽이 더 나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26세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북청전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적개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곧 건주위(建洲衛) 여진(女眞) 토벌 작전에서도 적의 우두머리인 이만주를 죽이는 등 뛰어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업적과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파격적으로 승진하여 27세에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반년 뒤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였으며 바로 한 달 뒤에는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 27세에 국방 최고 책임자가 된 것은 조선 역사상 그가 유일하다. 그러나 급격한 오르막에는 급격한 내리막이 있다고 했던가. 세조가 승하하기 13일 전에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예종의 즉위 당일 바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었다가, 한 달 뒤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저자에서 처형됨으로써 그의 삶이 마감되었다. 순조대에 와서야 사면되어 관직이 복구되고 ‘충무’의 시호가 내려졌다.

뛰어난 능력과 웅대한 포부, 그리고 두드러진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이렇게 짧게, 또 비극적으로 끝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물론 음해와 고변을 무기로 영달을 도모한 간특한 모사 유자광의 혜성 출현에 대한 해석을 빙자로 한 고변에 따른 것이지만, 훈구대신과 신진세력 간의 세력 다툼과 왕권 장악에 불안해하고 있던 예종의 귀성군 이준 등 연부역강한 사촌 등 왕족들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모반 혐의는 이순신 등의 예에서 보듯 탁월한 무장에게 따르는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화와 복은 함께 다닌다(화복동행·禍福同行)’, ‘음과 양은 동일하게생긴다(음양동생·陰陽同生)’,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찬다(일월영측日月盈昃)’는 등의 동양적 세계관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에 비추어, 치우치거나 가파르거나 넘치거나, 이례적인 경우는 그것이 화가 되든 복이 되든 상관없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미리 대비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함이 어떨까 싶다.

한마디 더 덧붙이면, 남이의 경우는 워낙 삶이 파격적이고 비극적이어서 해원(解寃)에 귀신 세계까지 동원되었으니, 즉 귀신으로 인하여 처를 얻었고 그 귀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산 자의 생사

와 길흉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을 비롯하여 강감찬, 최영 심지어 이순신까지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니 특이할 것도 없다.

이 시는 대단히 호쾌하고 웅대한 포부를 나타내고 있다. 호연지기가 물씬 느껴지는 시이다. 백두산 돌은 모두 군사들의 칼을 가는 데 소비하고 두만강 물은 모두 군마들을 먹여 말랐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군사인가! 이

런 군사를 거느리고 이십대에 태평성대를 만들겠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누가 대장부라고 불러 주겠느냐라는 것이다.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바꾸어 모함했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더라도 뜻에 무리가 없고 문맥상으로도 문제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으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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