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아래 첫째가는 명당 '금계리' 가장 살기 좋은 땅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서 말하는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땅 십승지. 그 가운데서도 일승지로 꼽힌 곳이 바로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다. 실제로 이 예언서를 보고 이북에서 내려와 자리 잡은 이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중환이 쓴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 편에서 “옛날 도사 남사고는 소백산을 보고는 갑자기 말에서 내려 절을 하면서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로구나!’하는 말이 알려져 이로 인해 큰 소백산이 이 나라 첫째가는 피난지가 되었다.”고 했으며 소백산 아래 풍기 금계리는 이렇게 첫째가는 명당으로 손꼽혀졌다. 


△ 역사속의 명당

경북과 충북을 가로지르는 소백산은 풍광도 아름답지만 산 아래 터 잡은 풍기는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적인 배경, 그리고 인삼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고려 때부터 많은 왕태(王太)가 안치됐을 만큼 인정받은 명당으로, 정감록의 십승지지설(十勝之地說)에 따라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정감록촌도 소백산 자락 금계리에 있다. 특히 풍기는 정감록의 십승지지 중 첫째로 알려지면서 6.25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들어 영남의 이북5도라고도 불렸으며, 이 같은 역사를 배경으로 이북에서 직물공장을 하던 월남민들에 의해 인견이 발달하기도 했다.

십승지지는 조선 후기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언서로, 조선 중기와 후기 민간계층에 깊숙이 전파되어 거주지의 선택 및 인구이동, 공간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조선후기의 정치 사회적인 혼란과 맞물려 민중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 자연환경이 좋고, 외부의 침략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가능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금계마을은 풍기읍에서 북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지세라 하여 금계포란형이라 구전되고 있다. 십승지 가운데서도 풍기 금계촌은 문헌에 첫 번째로 등장하고 있으며 1959년 조사연구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의 이주 동기 중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주한 주민들은 대부분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으로 이 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인삼을 재배하여 전국에서 가장 품질 좋은 삼 재배지를 만들었으며, 강화에서 이주해온 이들은 강화의 비단 짜는 기술을 퍼뜨려 우리나라 견직물의 최대 생산지를 만들어냈다.

△ 생명을 품어 안은 ‘소백’


소백산 영봉 비로봉에서 남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금계 저수지 아래 위치한 장선 마을을 안고 1.5km에 걸쳐 형성된 계곡이 나타난다. 금선계곡이라 이름 붙은 이 곳은 기암괴석의 골짜기와 노송이 우거져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이 고장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명종 문신이던 금계 황준량(1517~1563)이 금선대라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756년 부임한 풍기군수 송징계가 금선대란 이름을 바위벽에 새겼으며,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이름 붙게 되었다. 금선계곡의 숨은 명소로는 정감록촌과 삼포 마을이 있다. 정감록촌은 정감록을 믿고, 난세를 피해 산골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던 이들이 거주하던 곳이며, 인삼을 기르던 삼포마을과 어우러져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특별한 풍광을 자아냈다.

소백산은 백두대간의 중심으로,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소백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경계를 이루어 수많은 역사적 애환과 문화유산이 전해진다. 조선시대 천문지리학자이자 풍수가인 남사고는 소백산을 지나다 갑자기 말에서 내려 큰 절을 하며‘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와 전해지며,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갈린 산맥이 구름 위로 솟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3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남쪽으로 내려 뻗은 소백산은 영주를 비롯해 예천, 단양, 영월 네 고을의 배경이 되어 고장의 평화와 행복을 수호하며, 기품있는 선비의 풍모처럼 맑고 수려한 영기 어린 영산이라 일컬어졌다. 특히 소백산 허리를 감돌아 흐르는 아흔아홉 굽이의 죽령은 영남의 3대 관문중 하나로 과거를 보고자 한양으로 갔던 수많은 선비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길로, 이곳이 선비의 고장임을 대변하고 있다. 2천년 가까운 세월 영남의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영주시는 1999년 희방사 역에서 죽령주막가찌 2.5km를 복원해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 붉은 충절이 서린 땅

예부터 학자와 선비들의 본분은 나라가 어려울 때 바른 소리를 할 줄 알며,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국권이 일제에 강탈당했을 당시 국내외에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생겨난 가운데 국내에 있었던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단이 풍기에서 조직되고 활발한 운동을 펼쳤다. 1913년 채기중 선생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민족항일 결사를 배출했으며 노백린, 김좌진 등 많은 투사들이 광복회에 들어오게 하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을 결성, 광복의 초석을 마련했다.

△‘난세에 영웅난다’ 풍기가 배출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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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대표적인 명문가인 창원황씨가 바로 이곳 풍기출신이다. 마을 곳곳에 억새가 많이 이름 붙은 희여골에 자리 잡은 창원황씨 집성촌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는 중랑장을 지낸 황승후가 터를 잡고, 황승후의 아들 황처중은 조선초 영일감무를, 처중의 아들 황제는 서승을, 둘째 황천은 통례원봉례를 지냈다. 황전의 손자 황희성이 희여골에 정착한 후 큰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창원황씨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됐다. 황희성의 아들 황사우는 충청도사, 좌성지, 도승지 등을 거쳐 호조,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올랐으며 손자인 황응규(1518~1598)는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며 칭송을 받았다. 이를 이어 황섬 등 문과 9명, 사마시 34명이 급제하였으며, 근래에는 황설 국회의원, 황상구 변호사 등 16명의 판검사를 배출했다.

이 밖에 육군참모총장과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계원, 10, 12,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용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관료인 강경식,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역임한 송지영, 12년에 걸쳐 영주와 안동의 향토 문화유산과 선현들의 발자취를 답사, 분석, 연구하고 집대성한 송지향, 육군 777부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 1979년 대한민국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김계일, 전 국방부 기무사령관 김영한, 숙명여자대학교 제 19대 총장 강정애도 이곳 출신이다.

또 한국은행에서 36년간 재직했으며 이후 한국은행 감사, 금융결제원 원장, 기업은행 은행장, KB금융지주 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한 이경재와 검사 출신 법조인으로 제31대 검찰종장을 역임, 현재 대통령비서실 민정특별보좌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명재, 행정고시 8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후 대한민국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이재국장, 재무정책국장,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 예금보험공사 전무이사, 금융감독원 부원장 등을 거쳐 재정경제부 차관과 금융감동원장을 지낸 이정재 이른바 3才형제라고 불리는 이경재, 이명재, 이정재 형제도 풍기출신으로 유명하다.

▲ 인삼 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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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한 기자
권진한 기자 jinhan@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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