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화쟁' 강조…국론 하나로 모으는 귀중한 정체성 자원

▲ 정체성....원효
최근 이 나라는 여야 간 끝 모를 치킨게임 같은 대치정국을 국민은 목도하고 있다. 가상의 영화가 아니라 실상의 현실이다. 야당이 주도한 장관 해임건의안이 그 방아쇠다. 과거에 야당이 떼를 쓰는 모양은 심심찮게 봤지만 이번에는 여당이 사상 초유의 국정감사 보이콧과 당 대표의 단식농성 중이다. 이러한 경색 정국은 2017년 대선을 앞 둔 기 싸움 성격이라는 슬픈 분석도 나온다.

2016년 9월 한국은 한마디로 ‘불화(不和)’의 세태다. ‘화(和)’의 가치를 우리 역사에 깊게 새기고 큰 생각을 던진 이가 (통일)신라의 고승 원효(617∼686). 그는 고려 숙종 때(1101년)에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 명종 때 분황사(芬皇寺)에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웠다고 전해질 정도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효 대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으로 설(薛)씨다. 태종 무열왕의 공주(요석)와의 사이에 설총(薛聰)을 낳은 것으로 유명하고 한국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우리 역사에 대표적인 고승이다.

법명(法名)은 스스로 원효(元曉)라고 지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한국 불교 사상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해동종주(海東宗主)라고도 불린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했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대저술이다.

당시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한 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른다.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中觀論)과 유식론(唯識論)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국제적인 의미를 지녔다.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염정불이(染淨不二)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설총을 낳은 ‘실계(失戒)’의 사실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중대한 계기가 됐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치는 전설을 남겼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혜공·혜숙·대안 등이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불교를 일상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것에 걸림 없다는 뜻의 무애호(無碍瓠)를 두드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으로 불법을 널리 알렸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에 대한 안동 용수사 전 주지 상운 승려의 평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라고 했다.

누구나 한 마디씩 하는 원효의 전설이다. 원효는 650년 당나라 현장(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만주 요동까지 갔다가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경기도 화성으로 추정되는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진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되돌아왔다.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비 오는 밤길에 어느 땅막(土龕)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오래된 무덤임을 알았다. 해골 물을 맛있게 먹었다는 전설도 있다.

여기서 원효는 모든 진리를 체득하게 됐다. 또한 그는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 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한 때 성철 승려도 함부로 못했던 한국 불교의 고승(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함)의 원효에 대한 평이다

“원효는 분황사(芬皇寺) 등에 머무르며 불경의 연구와 ‘화엄경소(華嚴經疏)’ 등의 저술에 힘쓰기도 하였으나,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은 뒤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칭하며 서민 속으로 들어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으로 도구를 만들어 이를 ‘무애(無碍)’라 하였다. 무애(無碍)는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화엄경(華嚴經)의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본래의 마음을 깨달으면 정토(淨土)를 이룰 수 있으며,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원효의 활동으로 신라의 백성들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외우게 됐다고 전해진다.”

원효는 만년에 지금의 경주 고선사(高仙寺)에 머무르다가, 686년(신문왕 6년) 혈사(穴寺)에서 7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의 후손인 설중업(薛仲業)이 고선사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서당은 원효의 어릴 때의 이름, 즉 아명이다. 이 비석은 오늘날에도 일부가 훼손되어 전해지는데, 원효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원효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 이외에 중국의 송(宋) 나라 때에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 등에도 전해진다. 원효가 남긴 저술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모두 100여 종 240여 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일부만 남아 있다.

원효의 사상의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많은 저술에서 자신의 주장을 폄에 있어 ‘화쟁’(和諍)이라는 방법을 썼다. 석가모니 이후 1200여 년 만에 신라통일기에 나타난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석가모니 이후 대승에 이르기까지의 화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서울시 용산구의 원효로와 원효대교의 지명은 원효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상적인 원효정신의 계승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지역 분쟁, 남북 분쟁, 당파분쟁이 극심한 이 시대에 원효의 화쟁사상은 현대적으로 계승 승화시켜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지혜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는 귀중한 정체성 자원이다.

그의 사상은 1천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고 뛰어난 사상이라는 점에서 한국 정체성의 뿌리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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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모 논설위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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