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연꽃 향기 속 몰락한 왕조의 슬픔 느껴지는 듯

▲ 향원정에 가을빛이 물들고 있다. 꽃이 지고 연잎이 누렇게 황락의 가을을 맞고 있다.

“물과 육지에서 피는 초목의 꽃 가운데에 사랑스러운 것들이 매우 많으나,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이래로는 세상 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 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국화는 꽃 가운데 은자이고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꽃 가운데 군자라고 하겠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것은 도연명 이후에는 들은 바가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것은 나와 함께 할 이가 어떤 사람일까? 모란을 사랑하는 이들은 마땅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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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남쪽 출입문인 광화문.

북송때 성리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說)이다. ‘고문진보’에 소개될 정도로 대표적 명문장이다. 이 싯구 가운데서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香遠益淸 亭亭淨植)’는 이 시의 에센스다. 연은 군자를 상징한다. 그래서 수중군자라고 한다. 경복궁 후원에 있는 향원정은 바로 이 구절 ‘향원익청’에서 따왔다. 군자의 고결함은 세월이 지나거나 떨어져 있어도 그 정수는 더욱 고고하고 울림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공맹이 2,500년이 지나도록 인류에게 ‘향원익청’하지 않는가.

향원정 정자현판은 고종이 친필로 썼다. 향원정의 창건시기는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향원정은 건천궁의 후원인데 건청궁이 경복궁 중건이 끝난 다음해인 1873년(고종12년)에 지어졌으므로 대략 그 시기와 맞물려 건축됐을 것이다. 건천궁은 고종의 고집으로 지은 궁이다. 처음에는 비밀리에 내탕금으로 짓다 공사 도중 문제가 되어 중지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강행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거처로 이용됐다. 때문에 왕과 왕후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됐다. 경회루가 국가의 공적연회 장소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 건천궁입구. 향원정은 건천궁의 후원이다.
고종은 건천궁을 나와 다리를 건너 향원정으로 들어갔다. 이 다리는 취향교다. 향기에 취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다. 목교로서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들어가도록 북쪽에 설치됐으나 6·25전쟁 당시 없어졌다. 향원정 북쪽에 목교를 세운 주춧돌이 남아있다. 본래의 취향교는 조선시대 원지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길이 32m, 폭 165cm)이다.

현재는 1953년에 지은 다리가 향원지 남쪽에 있다. 그 당시는 건천궁이 복원되기 전이었으므로 경복궁에서 접근성이 좋은 남쪽에 다리를 건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07년 건천궁이 복원됐기 때문에 취향교도 본래대로 북쪽에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연 향기에 취해 다리를 건너면 향원정이 나온다. 정자의 평면은 정육각형으로 아래·위층이 똑같은 크기이며,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육각형으로 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일층과 이층을 관통하는 육모기둥을 세웠다. 일층 평면은 바닥 주위로 평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고, 이층 바닥 주위로는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두었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사방둘레의 모든 칸에는 완자살창틀을 달았다. 아래층에는 서쪽에 아궁이를 두고 온돌을 설치해 사철 정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은 서쪽에 설치했는데 북쪽에서 오르도록 돼 있다.

향원정의 2층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그런데 6개의 기둥 중 하나만 주련이 없다. 첫 번째 주련의 대구를 담은 주련이다. 정자 남쪽 오른쪽 기둥부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모두 5개의 기둥에 걸린 주련에는 차례로 시가 써져있다. 두 번째 기둥은 없다.

아름다운 연못에 용이 뛰쳐오르며 춤추고
천산에는 빛나는 달이 멀리까지 비추고
만리에는 뭇 별들이 밝게 빛나네
곤륜산 꼭대기에는 구름 노을 쌓였고
신선 사는 봉래에는 세월이 길도다.


향원정이 있는 호수는 향원지이다. 향원지의 9월은 연꽃이 지고 그 자리를 연잎으로 가득채웠다. 언제 꽃이 피기나 했느냐는 듯이 감쪽같이 꽃이 있던 자리를 지웠다. 그러나 시절은 가을이다. 푸른 연잎 사이 사이 황락의 갈색 얼굴을 한 잎들이 듬성듬성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향원지는 4,605㎡의 넓이의 방형인데, 모서리를 둥글게 조성한 방형의 연못에 연꽃과 수초 심고, 잉어를 넣어 못의 경치를 풍성하게 했다. 향원지의 수원은 북쪽 언덕 밑에 솟아나는 ‘열상진원(洌上眞源)’이라는 샘물이다. 우물뚜껑에 예서체로 ‘열상진원’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강은 다른 말로 ‘열수’라고 하는데 ‘한강의 진짜 근원’이라는 의미다. 결국의 조선의 근원이 이곳이라는 말로 풀이해도 되겠다.

향원지는 본래 세조 2년(1456)에 취로정(翠露亭)이 있던 곳이다. ‘세조실록’에 여기에 작은 연못을 파고 정자를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왕과 신하들이 모여 시를 짓기도 하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다. 외국사신이 경회루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끝나면 이곳에 들어 후원을 감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명종때까지 취로정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때 경복궁이 전소되면서 그 때 함께 소실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궁궐에 처음 전깃불을 설치했다. 대상건물이 건청궁이다. 고종은 향원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건청궁을 밝힌 전깃불을 감상했다. 건청궁을 밝힌 전기불은 향원지의 물을 증기기관으로 돌려서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전깃불을 ‘물불’이라고 불렀다. 그때는 고장이 자주나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했는데 ‘건달불’이라고도 했다.

김연아가 2010년 캐나다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앞으로 언제 또 이런 대역사가 일어나겠는가. 김연아 쾌거의 시발이 향원정에서 일어났다. 1894년 겨울, 우리나라 최초의 피겨스케이팅 대회가 외국사신과 고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쳤다.

향원정은 서세동점하던 구한말,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건천궁내 옥호루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시체는 건천궁 옆 녹산에서 태워지고 그 흔적은 향원루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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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경복궁은 1394년 조선 건국 2년 뒤에 건축된 조선 최초의 궁궐이다.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君子萬年 介爾景福)’이라는 ‘시경’‘주아’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완전 소실된 뒤 270년만인 고종 2년(1865) 중건됐다가 중건 30년만에 황후가 경복궁내 건천궁에서 일본의 시정잡배에게 시해당했다. 그 역사의 아픔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정자가 향원루다. 연꽃의 향기가 멀리간다는 뜻을 여기서는 아무래도 명성황후의 한, 대한민국 치욕의 역사의 한 쯤으로 생각해도 되겠다 싶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 경복궁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문화해설사는 영어로, 중국어로, 또 다른 나라말로 경복궁과 향원정의 역사를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 중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일본인 관광객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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