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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 교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상생(相生)이라는 말이 항간에 넘친다. 정부나 지자체, 노동계와 재계에서도 국제화 시대의 한국이 지향할 목표로 상생을 들고 있고 이를 활동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상생한다는 말이 정작 필요한 곳은 여의도일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갈등을 해소해야 할 정치가 갈등의 기폭제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의 갈등을 이익갈등과 가치대립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익갈등은 충족요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다과(多寡)를 둘러싼 분할 가능한 대립이다. 반면 가치분쟁은 자신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이므로 이건지 저 건지의 분할 불가능한 범주의 대립이다. 이익갈등은 공평한 분배를 요구한다. 따라서 원리적으로는 공정한 기준만 정하면 해결 가능성이 있다. 이익갈등을 극복하고자 한 최초의 시도는 토마스 홉스다. 홉스는 정의의 문제를 교환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로 나누었다. 전자는 사물의 가치가 동일함을 전제로 한 계약상의 정의로서 그 이행에 본질을 두고 있다. 후자는 동등한 가치 있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이익을 배분하는 것이고 이것이 공평이다. 홉스는 이처럼 주체의 대등(교환적 정의)과 결과의 공평(배분적 정의)으로 나누어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

가치갈등은 자신의 입장이나 주의 혹은 신조에 대한 정당성의 승인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차이의 인정이나 존재의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갈등은 형태가 없고 원리적으로 분배가 불가능한 모 아니면 도일뿐이다. 가치대립은 그 기저에 세계관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주의나 신조의 정당성과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끝없이 싸울 경우도 있다. 이러한 예로 우리는 며칠 전 여당 대표의 단식을 보았다. 현재 우리 정치권의 가치대립은 더욱 심해지고 혼미상태는 한층 도를 높이고 있다. 해결책은 없을까?

요즘, 국정감사장과 정국을 마비시킨 여야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논자는 상생론은 제시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내재한 각종 대립의 근본원인을 본질적인 방식으로 규명해야 상생이 가능하다. 그러면 이러한 대안은 어떤 원리나 원칙에 따라야 하는가? 상생이 의무로서의 선택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행위이어야 하는가? 선택한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다른 사람과의 공감, 혹은 자신의 이익과 감정이 배제된 의무로써 선택한 것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갈등과 대립하는 양극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있어 그것이 화해에 이르는 것을 찾는 것”이 정치라고 했다. 헤겔의 입장과는 달리 칸트의 도덕적 자유론에서는 타인을 목적으로 다루라고 한다. 타인을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게 해야 한다. 칸트는 이것이 도덕법칙이고 도덕상의 명령이라 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가지려면 어떤 감정과 무관한 그냥 의무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상생은 사람들에 대한 의무 혹은 약속으로 나타난다. 상생은 외부의 요청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자발적인 행위로 선택해야 한다.

우리 정치판을 보면 상생과는 멀어 보인다. 한국 정치판의 갈등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답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상생의 주체는 권력을 놓고 대립하는 여야이다. 다음은 어떤 가치의 대립인가가 문제이다. 국리민복을 두고 대립하기를 바란다. 여야의 가치대립이 이념과 정파적 이익과 무관한 국리민복을 위한 그냥 도덕적 법칙으로서의 의무에 따른 것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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