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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30.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

충효·학행·행의 실천한 임란 공신 남경훈 후손 세거지

최길동 기자 kdchoi@kyongbuk.com 등록일 2016년10월09일 19시53분  
▲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 전경

영덕에서 7번국도 울진방향으로 약10분쯤 가면 영해 송천교차로서 내려 영해 영양 간 918번 지방도로의 출렁이는 황금들녘을 약5분정도 가면 도로변 좌측에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1호 영덕 영양남씨 난고종택 있다. 난고(蘭皐)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지낸 성균관 진사 남경훈(南慶勳, 1572~1612)의 호이다. 이 집은 난고의 아들 안분당(安分堂) 남길(南吉, 1595~1564)이 1624년(인조2년)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건립했다


난고종택은 조선시대 상류층인 사대부들의 생활상과 건축에 대한 의식이 잘 보존, 전승돼 있으며 대문채, 정침, 만취헌, 불천위사당, 별묘, 난고정, 주사 등 총 7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동향의 대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취헌(晩翠軒)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측에 나란히 정침(正寢)이 배치되어 있다. 그 우측 상단으로는 담장을 두른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과 별묘(別廟)가 있다. 불천위사당과 별묘의 우측에는 난고정(蘭皐亭)과 주사(廚舍)가 자리 잡고 있다.

~ 중략 ~ 섬 오랑캐의 난을 만나자 공은 약관의 나이로 의병진에 나갔다 흔쾌히 만번을 죽을 지라도 한 몸숨 살기를 돌아 보지 않는 뜻을 냄이 있어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진의 막하에 글을 보내어 군령을 준비하고 무기를 쌓고 몽둥이를 들고 치고 때리는 계책을 의논하니 ~ 중략 ~ 사람들은 세 번 바꾸어 그 땅을 얻었으니 땅은 오랜 세월을 그 사람을 기다린 것이다.... 〈 난고정기 〉

△난고종택이 있는 원구마을

원구(元丘)마을명의 유래는 으뜸 거북이란 뜻으로, 원구(元龜),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라 해 뚜들 혹은 원두들, 으뜸 언덕이라는 뜻으로 원고(元皐), 넓은 평야가 있는 들이라는 뜻으로 원파(元坡)등으로 불렸다. 이 마을은 ‘이씨 터전에 남씨 골목’이라는 구전이 있듯이 먼저 터를 잡은 것은 진성이씨며 현재는 영양남씨, 무안박씨, 대흥백씨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는 동성마을이다. 구좌옥새형(龜座玉璽形)인 중구봉(重九峰)을 중심으로 멀리 동으로 해발 183m의 상대산(上臺山)이 있고 서쪽은 일월산의 갈래인 해발 703m의 형제봉(兄弟峯)이 남으로는 산모양이 고래와 같은 해발 301m의 경악산이, 북으로는 해발757m의 등운산(騰雲山) 줄기인 옥녀봉(玉女峰)등이 둘러싸고 있다.

△난고종가의 풍수

난고종가는 흔히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에 속한다고 하며, 이 집터는 하지(何知)라는 분이 잡았다고 한다. 그는 이곳이 늪지대이지만, 이것을 메우고 집을 지으면 천 년 동안 자손이 번성한다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난고종택은 400여년간 양자를 삼은 적인 없고, 종가에 종손이 집을 비우지 않고 지키고 있다고 한다.

주산(主山)인 현무는 중구봉으로 해 장수와 부지런함과 굳센 의지를 갖게 하고 안산(安山)인 용당산이 있고, 그 너머 해풍을 막아주는 옥인(玉人) 또는 투구와 필봉 같이 생긴 상대산이 있어 과거 급제자가 많이 배출하게 됐다고 한다. 좌청룡인 익산(翼山, 등운산)은 학의 날개를 형상화하고 있어 북풍으로부터 막아주며 우백호 격인 용당산 위의 능인 범뒤미산과 그 너머 고래산은 남쪽 풍난과 햇빛을 적당히 조절해 주는 형상을 하고 있다.

풍수에서 기(氣)를 가져오는 수득(水得)은 남천과 북천으로 두 줄기가 젖줄이 되어 풍부한 물을 생산해 농산물을 풍족하게 했다. 이러한 명당의 여건을 갖춘 가운데 연지(蓮池) 위쪽 평지에 아늑하고 안정된 지형과 지세에 평화롭고 어머니 품안과 같은 보금자리를 잡은 난고종가이다.

종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정기를 받아 난고 이후 9대손까지 한 대 빠짐없이 29명이 35회에 걸쳐 과거급제자와 출사자를 배출했으며, 학행이 뛰어난 시문과 문집 등을 편찬한 문헌들로 많이 나왔다고 한다. 또 나라에 충성하는 절개와 부모에 효도하는 효행자도 많았다고 한다.

△난고 남경훈의 생애와 활동

남경훈은 중시조 남홍보의 14세손으로, 1572년 11월 4일 영해의 원고리(元皐理)에서 태어났다. 남경훈의 아버지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조산대부 군기시 판관(朝散大夫 軍器寺 判官) 남의록이며, 어머니는 춘천박씨로 직장(直長) 박인수(朴仁壽)의 딸이다. 학문은 퇴계 학맥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에게 사사했으며, 임진왜란 때 약관의 나이로 부친 남의록과 함께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선무궤향(宣武饋餉)으로 조산에 진급해 벼슬은 판관에 이르렀다.

남경훈 의 부친인 남의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해 전장으로 나갔다. 당시 약관의 나이였던 남경훈은 부친을 따라 출전할 것을 부친에게 청했다. 그러자 남의록은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되고 자식된 자가 높은 베개에 편안히 누워 있을 세월은 아니다. 네가 약관의 나이로 전란에 임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칠 의리를 알고서, 한 몸 죽고 삶을 계산하지 않으니 내 어찌 자식 사랑하는 생각으로 너의 가상한 뜻을 막겠느냐”〉 하며 허락했다.

남경훈 은 부친과 함께 경주성 회복을 위한 문천회맹(蚊川會盟)에서 결사항전을 서약한 후 경주성을 수복했다. 그 후 영천성 복성 전투에 참전하고, 문경 당교회맹(唐橋會盟), 대구 팔공산회맹 등을 통해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창녕 화왕산성진으로 달려가 참전했다. 현재 임진왜란 공적으로 경주 황성공원 동도복성비(東都復城碑)와 대구 망우당공원에 임란영남호국충의단기념비(壬亂嶺南護國忠義壇記念碑)에 부친 남의록과 함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임진왜란 당시 남의록과 남경훈은 망우당 곽재우의 의병 진영에 참가했는데, 남경훈은 경상도의 대표 의병장이었던 곽재우에게 군대의 인화, 군대의 선발, 무기체계, 군량조달 등에 관한 승전책(勝戰策)을 올렸다. 곽재우에게 글을 올려 병사(兵事)를 논하였다는 기록이 『망우당집(忘憂堂集)』에 실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남경훈이 20대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병법에 관해서 통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한 두 곳 또는 1~2회 참전한 의병들은 그 공적으로 공신이 되고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7년 동안 전장을 누빈 남경훈은 공신록(功臣錄)을 받아 음직으로 출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공을 부친에게 돌리고 학문에 몰두했다. 남경훈은 1606년에 향시(鄕試)에서 장원하고, 이듬해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해 합격한다. 당시 시관(試官)이던 우복(愚復) 정경세(鄭經世)는 그의 문장을 보고 “이는 세속 선비들의 흔해빠진 사장(詞章)의 학문이 아니다”라고 칭찬했다

이어 남경훈은 성균관 진사에 선발되면서 학문이 높다는 소문이 자자해졌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소문이나 명성을 부끄럽게 여기고 시를 지어 자조(自嘲)했다. 남경훈은 벼슬의 뜻을 접고 집 정원 동쪽에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고기를 기르며 심신을 수양했다

임진왜란 후 부친인 남의록이 마을사람을 대표해 수탈이 극심한 탐관오리 영해부사를 탄핵한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해 남의록이 도리어 관원을 능멸했다는 것과 무리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잡혀 안동 감영으로 이송돼 감옥에 갇히게 됐다. 남경훈은 순찰사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고 자신이 늙은 부친의 옥고를 대신 하겠다고 했다. 순찰사의 허가를 얻어 남경훈은 부친 대신 감옥에서 그 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옥고를 치뤘다. 이 사건은 결국 무죄로 판명되고 영해부사는 파직됐다. 이 때 겪은 고초로 병을 얻게 된 남경훈은 1년을 고생하다 1612년 겨울에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됐다. 효심으로 인해 부친보다 8년 먼저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남경훈의 충효와 학행과 행의(行誼)를 기념하기 위해 1756년(영조32)에 영남 유림의 공의(公議)가 있어, 1804년(순조 4) 광산서원(光山書院)을 건립하여 제향 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남경훈은 영양남씨 중에서 유일하게 불천위(不遷位)로 매년 음력 11월 9일에 모셔 진다.

△ 16대 종손 남석규

종택의 16대 종손 남석규 (71세)는 외지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하다 부친 별세후 “봉제사 접빈객”- (지체높은 집안의 한해 일상을 함축한 표현 인데 봉제사-제사를 모시고, 접빈객-손님을 접대한다 )의 종손의 삶을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종택 구석 구석을 돌아보며 잡초제거, 집안관리등 으로 하루가 모자란다고 하며 종부(최윤영:68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신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종손의 삶을 살고 있고, 자식들에게는 종손의 삶을 강요하진 않지만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고 ...

또한 350년간 한 대도 빠짐없이 종손들의 유고를 모아 편찬한 시문집 「영산가학」「가고」는 시대별 문집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적 자료로 2016년 10월 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 했다.

불천위사당및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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