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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총장
昔聞洞庭水(석문동정호·예부터 들어온 동정호)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랐네)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오나라와 초나라 동남으로 나뉘어 있고)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하늘과 땅에 낮과 밤이 뜨네)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친한 친구는 소식 한 자 없고)
老病有孤舟 (노병유고주·늙고 병든 나는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관산 북쪽은 아직도 전쟁이라)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

이 시는 두보가 말년에 악양루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고 그 감회를 읊은 것이다. 동정호의 굳센 기상에 압도되어, 늙고 병든 몸으로 방랑하는 자신의 신세와 아직도 전란에 휩싸여 있는 나라 걱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웅대한 동정호와 침통한 자신, 완전히 평화로운 자연과 지극히 어지러운 인간, 기쁨과 환희, 슬픔과 고뇌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두보는 ‘시성(詩聖)’ 또는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의 ‘시사(詩史)’로 불릴 만큼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시대 이제현(李齊賢) 등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조선 시대에는 왕명으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가 편찬될 정도였다.

두보는 7세에 시를 짓는 등 시재는 일찍이 인정받았으나 벼슬 운은 지극히 없었고 정치적 재능마저 부족했다. 그의 평생은 불우하고 궁핍한 가운데 내란과 외우를 피해 늘 피난길 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애는 지극하여 언제나 가족과 함께 있으려 했고, 잠시라도 떨어지게 되면 처자의 신상을 염려하는 애정 어린 시를 남겼다.

그의 삶과 시는 한마디로 성실, 그것도 위대하다고 말할 정도의 성실한 자세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과 밥과 시, 그리고 자신에 성실했던 그는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을 처절하게 견뎌 내면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찾아 우수와 감동을 엮었다.

개인과 국가, 그리고 사회의 고난을 온몸에 지고 시를 썼던 그는 59세를 일기로 동정호의 배 위에서 삶을 마감했다. 며칠을 굶다가 갑자기 고기를 먹고 체해 죽었는데, 곽말약에 의하면 병에 걸린 소고기였다고 하니 참으로 하늘도 무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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