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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한 친구의 경험담이 심금을 울립니다. 일반적으로 고위 공무원이 퇴직하면 약간의 배려를 받습니다. 관련 공기업의 임원이나 대학의 석좌 교수 자리 같은 것이 일시적으로 주어집니다. 이 친구도 9개월 정도 그런 혜택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완충 기간이 끝나고 난 후의 일과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소외(疏外)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외는 존재론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만 이 친구에게는 그 두 양상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할 일 없이 지하철을 타고 이리저리 다녀보기도 하고, 절에 가서 108배, 1천배, 2천배, 3천배도 해보고 아직도 현역으로 일하는 전문직 친구들의 사무실도 기웃거려 봤지만 끝내 소외는 극복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혼자 던져진 아픔을 털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다른 친구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부를 좀 해 보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학습사회의 도래가 점쳐지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일종의 프로슈밍(prosuming·생산적 소비)으로서의 학습 및 교습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비시장적 경제를 형성해서, 생산자가 소비자를 겸하면서 하는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와인 마시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모임을 만들고, 건강과 취미생활을 위해 춤이나 검도나 바둑 등을 배운 이들이 스스로 도장이나 교습장을 차려서 교습활동을 하는 일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오면 고령사회는 ‘사막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간지에서의 삶’으로 바뀝니다. 프로슈밍으로서의 학습은 ‘거대한 밭’으로 우리를 기다립니다. 문맥은 조금 다르지만, 옛날이야기에서도 그 비슷한 지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공(子貢)이 남쪽의 초나라에 여행하고 진나라로 돌아오려고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이 마침 밭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땅에 굴을 파고 우물에 들어가 항아리로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밭에 물을 주는 일이 쓰는 애에 비해서는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으면 하루에 백 이랑도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금만 수고해도 효과가 큽니다. 당신은 그렇게 해보실 생각이 없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말했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기계를 만드는 것이지요. 뒤는 무겁고 앞은 가볍습니다. 아주 쉽게 물을 퍼내는데 그 빠르기가 엄청납니다. 그 기계 이름을 두레박이라 부르지요.” 밭일을 하던 노인이 순간 얼굴을 붉히더니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내 스승에게 들었소만,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생기고 그런 일이 생기면 또 반드시 기계에 사로잡히는 마음이 생겨나오. 그런 마음이 가슴 속에 차 있게 되면 순진 결백한 것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없어지면 정신이나 본성의 작용이 안정되지 않게 되오. 그러면 도가 깃들 수가 없다는구려. 내가 두레박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라오. 도(道)에 대해 부끄러워 쓰지 않을 뿐이오.” 자공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인 채 잠자코 있었다. ‘‘장자’ 외편, ‘천지(天地)’’

공자의 수제자 자공이 위포자(位圃者·밭일 하는 사람)를 보고 잘난 척하다가 망신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도(道)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를 프로슈밍의 효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굳이 수양(修養)까지는 아니더라도, 돈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크게 인정받을 날이 꼭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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