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감상> 아득한 오늘이 지나갔다. 나는 오늘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아무리 팔을 뻗어도 오늘을 잡을 수 없다. 아무리 발을 뻗어도 오늘은 발끝에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오늘로부터 내가 왔다는 기억은 떨어진 은행에서 나던 악취, 그 익숙한 악취가 오늘로부터 흘러와 지금의 나에게까지 흐르고 있다 추억도 아닌 것이…  (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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