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계곡·붉은 절벽·흰 바위…삼색일경 '천상의 하모니'

방호정. 방호 조준도가 신성계곡입구 절벽위에 세운 정자다.
청송군 안덕면 신성계곡은 청송 현서면 갈천리 보현산에서 발원해 안덕면을 관통하는 물길 이다. 신성리에서 고와리 까지 길안천 15km 구간이다. ‘청송8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주왕산·현비암·달기폭포·얼음골 같은 이름 값 높은 명승을 제치고 청송 1경으로 우뚝하다. 신성계곡의 대표경승지는 백석탄(白石灘과) 자암(紫巖), 방호정(方壺亭)이다. 


백석탄은 ‘하얀 돌 사이를 흐르는 여울’이다. 하얀 돌무더기들이 계곡을 빼곡이 채우고 있다. 바위를 스치거나 때리며 지나는 물소리가 여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대단히 우렁차다. 기기묘묘한 바위가 알프스 연봉의 설산 축소판 같다고 해서 ‘미니 알프스’라고 한다. 700만년 전 이뤄진 화산활동의 결과물이다.

▲ 방호정
차를 타고 가다 도로 가에서 붉은 빛을 띤 웅장한 절벽을 보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영화 ‘적벽대전’의 적벽이 연상됐다. 병풍을 펼쳐놓은 듯 가파르고 길게 늘어선 붉은 절벽 아래 눈부시게 푸른 강물이 흘러가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이다. 옛 청송 사람들이 자줏빛 바위라는 뜻의 ‘자암(紫巖)’이라 불렀다는 곳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을 연상해 ‘적벽(赤壁)’ 또는 ‘붉은 병풍바위’라 부른다.

신성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이 방호정이다. 백석탄, 자암과 함께 신성계곡을 청송 1경으로 등극시킨 명승이다. 거대한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그 절벽 위에 정자가 들어섰다. 절벽은 정자의 다리가 됐고 길안천 강물은 정자의 발을 씻으며 자암과 백석탄을 향해 흘러간다. 정자 뒤로는 억만세월 풍파를 견디어 낸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방호정 뒤에 있는 방대강당
□ 방호 조준도, 어머니 그리며 세운 정자


방호정은 1619년 방호 조준도(1576~1665)가 돌아가신 모친 안동권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본래는 ‘풍수당 風樹堂’이라 이름 했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풍수지탄’에서 따 왔다.《시경》에 나온다. ‘어버이 살아실재 섬기기란 다하여라’는 말이다. 어머니 생각에 지은 건물이라고 사친당(思親堂)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정자안에 걸려 있는 시판에 그 마음이 잘 드러난다.

방호가 낭풍산에 있다고 누가 말했는가
우연히 와서 이 산속에 자리 잡았네
20년간 텅 빈 방대는 하늘이 오래 아낀 것
높이 솟은 석벽은 귀신의 솜씨로세
특별한 이곳 기이한 경치는 병풍속의 그림 같고
앞서간 사람의 아름다운 시고는 붓끝의 무지개 같네
정자를지은 건 어머니 묘소를 보기 위한 것
부모님 여읜 이 몸 벌써 쉰 살이라네


정자 이름 방호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산 또는 섬 중의 하나다.‘열자(列子)-탕문(湯問)’편에 ‘발해의 동쪽에 큰 동학이 있고, 그 가운데 다섯 산이 있는데, 그 셋째를 방호라고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다섯 산은 대여 원교 방호 영주 봉래다. 정자의 주인인 조준도가 신선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조준도는 함안이 본관으로 청송 안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망운공 조지. 판서에 추중됐다. 어머니는 습독 벼슬을 한 권회의 딸인 안동권씨다. 조준도는 6살 때 재종숙부 사직동 조개에게 입양된 뒤 유일재와 김언기 문하에서 수학했다.

조준도는 방호정을 선경으로 생각하고 뜻이 통하는 창석 이준, 동계 조형도, 풍애 권익, 하음 신집 등과 방호정에서 교유했다. 이준은 상산일호, 조형도는 청계도사, 권익은 청부우객, 신집은 청학도인이라 했고 조준도 자신은 송학서하라 부르며 신선세계를 동경했다. 이 때문에 방호정 일대 골짜기를 오선동(五仙洞)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벼슬 자리는 나아가지 않았다. 실제로 조준도는 중직대부에 임명됐지만 방호정에 파묻혀 학자들과 강론하기를 즐겼다. 나라 걱정도 많았다.

□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의병장 자처한 조준도

조준도가 17살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준도도 일어섰다. 그러나 형 조종도와 조형도가 김성일과 곽재우를 따라 창의에 나서는 바람에 노모를 자기가 모셔야 했다. 그는 참전하지 못하자 그 분함을 시로 남겼다.

남아의 사업이 어찌 이 뿐이랴
모름지기 괴수 수길의 목을 베어 와서
능연각 위에 내건 후에
창주로 돌아와 낚싯대를 드리우리라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 장현광 정경세에 의해 의병장으로 발탁돼 전장에 나선다. 동지를 규합하고 통문을 띄워 군량미를 모으고 사재를 털어 군수물자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해 3월에 강화가 성립돼 의병을 자진 해산했다. 의병활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종 6품 의영고 주부가 됐으나 곧 사퇴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한양이 함락됐고 임금은 남한산성에 몸을 피했다. 조준도는 다시 일어섰다. 문경으로 달려가 동지를 만나 창의를 논의했다. 그러나 무력한 임금은 산성 문을 열고 나와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 구고도를 했다. 그 굴욕을 당하고 강화를 맺었다.

조준도는 현종대에 들어와서 89세의 나이로 통정대부와 부호군을 제수받고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방호정 옆에 있는 조준도 유허비
□ 김성일 등 명사의 시판 기문 가득한 정자


방호정은 온돌방을 갖춘 당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정면에서 보면 일자형 건물이지만 뒤에서 보면 건물 왼쪽에 뒤로 방을 낸 ‘ㄱ’ 형 건물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왼쪽 대청 마루 뒤에 2칸 규모의 온돌방을 배치했다. 계류 쪽 건물은 맛배지붕이고 뒷부분은 팔작지붕이다. 정자안에서 창문을 열면 길안천 푸른 물은 물론 강 건너 들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들판 어느 곳에 조준도의 어머니 안동권씨의 묘소가 있었다고 한다.

김동완 칼럼리스트.jpg
▲ 글·사진
김동완 자유기고가

방호정 내부는 시문과 기문 현판으로 빼곡하다. 이민성의 ‘풍수당기’와 조건의 방호정사 상량문이 보이고 조준도 자신이 쓴 시판도 보인다. 창석 이준과 학봉 김성일의 시판도 있다. 조준도가 김성일에게서 수학했다는 말도 있고 조준도의 형 조종도가 김성일을 따라 임진왜란때 진주성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에 그 인연으로 이곳을 찾아와 시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건 김성일은 청송과 깊은 인연을 맺었는데 안덕면에 있는 송학서원이 퇴계 이황과 여헌장현광, 학봉 김성일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김성일은 방호정의 승경을 보고 ‘제방대정’이라는 시를 남겼다.


산골짜기 천겹으로 겹쳤으니
시내는 몇 굽이로 흐르겠는가
외딴 마을 골짜기 어귀에 자리하고
높은 정자는 바위머리에 기대있네
산속의 개는 울타리가에서 짖고
바다 갈매기는 모래사장에서 졸고 있네
손님이 와서 오랫동안 앉아있는데
봄날 해그림자 물가로 내려오네

방호정 하류에 있는 백석탄. 바위가 알프스 연봉을 닮았다고 미니 알프스라고 한다.
방호정의 방호는 바다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 중의 하나다.

김동완 자유기고가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