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왕, 선덕의 인재등용책 등 탁월한 리더십 배워야

▲ 선덕여왕릉

▲ 이정옥 위덕대 교수
평생교육처장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이다. 어릴 때 이름은 덕만이다. 신라 26대 진평왕의 세 딸 중 맏딸이다. 동생은 천명, 셋째는 선화다. 천명은 훗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를 낳았으며, 선화는 백제 무왕과 결혼하였다. 


아버지 진평왕은 무려 53년간이나 재위했다. 632년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나라사람들이 모두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즉위한 셈이다. “성골(聖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다”《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이다. 당시 신라는 성골과 진골 중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덕만이 비록 여성이었으나 골품을 중시한 당시 왕의 자격 요건이 더 유효하였기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성골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준비된 왕재(王才)였음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덕만은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며 사리에 밝고 민첩하였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에도 전하는 모란꽃 그림의 일화를 적고 두고 있다. 삼국유사 기이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에서는 두 가지의 일화를 더 보태어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얘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이야기를 통한 우회적 방법으로 선덕여왕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여성이라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을까

이렇게 지혜와 명민함과 예지 능력까지도 갖추었다 할지라도 여성이 왕위에 오른 초유의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또한 선덕여왕은 몇 살에 왕위에 올랐을까.

선덕여왕이 즉위한 한 해는 632년이다. 이 해는 중심으로 주변인물을 통해 여왕의 나이를 추정해 보자. 선덕여왕의 조카 김춘추는 603년에 태어났으니 선덕여왕이 즉위한 632년 김춘추는 30살이다. 김춘추의 어머니이자 선덕여왕의 여동생인 천명의 나이도 짐작할 수 있다. 천명이 최소한 20살에 김춘추를 낳았다고 가정해보면 선덕여왕 즉위할 때 김춘추가 30살이었다면 천명은 50살이었다. 왕위에 오를 당시 동생이 50살이었다면 선덕여왕도 50살이 넘었음은 확실하다. 선덕여왕은 50이 훨씬 넘은 할머니 때에 왕위에 올랐다.

사회구조적으로 신분 혈통이 그만큼 중요했고 진평왕이 아무리 왕권을 강화해서 기반을 다졌더라도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덕만공주의 개인적인 자질뿐만 아니라 국내외적으로 명분이 필요했는데 일본의 사례도 있었다. 여자도 왕위를 이을 수 있다는 명분이 축적되고 이를 강력히 뒷받침하는 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세력이 적극적으로 선덕여왕을 옹립하는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최초의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더 찾는다면 당시의 신라 여성의 지위가 상상 이상으로 만만찮았음을 들 수 있다. 선도성모, 운제성모, 치술신모와 같이 여성이 국신으로 숭배되고 제사장으로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전통이 뿌리내린 사회가 바로 신라였다. 신라 사람들은 여성의 즉위에 별 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나라사람들이 추대하여’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또한 신라 여성의 일상적 지위와 경제력도 남성과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신라에서는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여성이 존중받고 그들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가장 손쉬운 척도 중의 하나는 경제력일텐데 신라의 여성들은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매우 많다. 당대 절이나 탑을 조성할 때 시주한 여성의 이름이 기록으로 많이 남아있다. 또한 신라 여성들은 당시의 상속제도였던 균분상속제로 그들에게 속한 재산을 소유하였고 스스로 처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산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신라 당시 주력산업이었던 직물산업에 여성 자신의 이름으로 제조업체를 운영하였으며,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황실창고인 정창원에 보관된 양탄자는 신라에서 수입한 것인데, 그 꼬리표에 ‘자초랑댁’이라는 제조업체의 브랜드명이 당당히 박혀있다. 이렇게 여성이 노동과 상속을 통해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신라였기에 여왕의 탄생이 그다지 큰 저항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 안에서는 선정을, 나라 밖으로는 실리외교를 펴다.

삼국유사보다는 좀더 사실적인 역사서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에는 왕의 재위(632년∼647년)년간의 치적을 매우 상세히 기록해 두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종합하면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당찬 여왕으로 평가받는다. 나라안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어루만졌으며, 구휼사업에도 힘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왕 당대의 국내외 정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왕은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능력있는 장군들을 발탁하였고 동시에 당의 도움을 청하는 실리적인 원거리 외교정책을 폈다.

△탁월한 인재등용책을 쓰다

선덕여왕은 전선을 누빌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핸디캡에 용병술로 맞섰다. 선덕여왕에게 뽑힌 인재는 최고의 인재는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가야의 후손 김유신과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신분적 약점을 지닌 김춘추를 등용했다. 또한 여왕은 인재양성을 위해 선진문명지인 당으로 유학을 보냈다. 여왕은 즉위 9년(640년) 신라의 많은 자제들을 당으로 유학을 보내면서 친히 당 태종에게 국학에 입학하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다양한 문화업적을 이루다

선덕여왕은 다양한 문화적 업적을 이루어낸 왕이기도 했다. 선덕여왕 3년에 서라벌 북천 남쪽에 절을 세우고 분황사라 이름 지었다. 실패, 바늘통, 가위, 그리고 금바늘과 은바늘 등 바느질 용구들을 감실에 넣었다. 왕이 곧 부처라고 믿었던 신라의 불교적 신앙을 미루어 보면 이 절은 왕실사찰이면서 또한 선덕여왕의 절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절의 이름에 여왕이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간곡한 호국의지를 실었다. 또한 그 다음 해 영묘사도 낙성했다. 영묘사(靈廟寺). 혼령을 모신 절이다. 여왕 즉위 16년 단 한 해도 전쟁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영령들을 위해 지은 절이다. 여왕은 그가 지은 수많은 절중에서도 이 영묘사에 가장 자주 들렀다.

왕 즉위 5년(636년)에는 자장(慈藏) 법사가 불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당 나라에 갔다. 자장은 12년(643년)에 2월에 돌아온 이후부터 여왕의 불교적, 문화적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또한황룡사는 신라 당대 최고의 절이었다. 여왕 즉위 5년(636년) 3월 여왕이 병이 들자, 이 황룡사에서 백고좌를 여는 등 불법의 힘에 크게 의지하였다. 그러나 불력에의 의지는 개인적인 취향만이 아니었다. 여왕에게 부처의 힘은 곧 국가를 지키고자함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신라 최대의 절 황룡사에 동양 최대의 탑을 세운 것도 선덕여왕의 호국의지의 발로였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여성이 임금이 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했지만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왕이 또다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망하기는커녕 10여 년 후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왕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며, 백성들은 성스러운 황제 할머니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친근하게 여왕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선덕여왕 경모회’, 대구 팔공산 부인사 숭모전

몇 해전 우리나라 고액권 화폐에 여성을 모델로 하겠다는 발표가 선덕여왕 또한 강력한 후보였기도 했다.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는 선덕여왕을 기리는 숭모전이 있다. 해마다 3월에는 대구의 여성단체협의회가 주관하는 선덕여왕숭모제가 개최된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이 지은 20개가 넘는 사찰 중의 하나였기에 그 뜻을 숭모하는 행사는 뜻깊다.

몇 해전 경주에서는 ‘선덕여왕 경모회’가 창립되었다. 여왕의 탄생지이자, 여왕의 유적이 가장 많으며 여왕릉이 있는 경주에서 선덕여왕을 기리는 여성 단체가 없음과 여성행사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긴 뜻깊은 여성들의 모임이다. 매년 여름 여왕의 기일에 맞춰 추모제를 지내고 있으며, 최근에는 선덕여왕릉의 능참봉으로는 여성이 임명되어 최근 3대 능참봉이 활약을 하고 있다.


김정모 기자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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