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蘭兮靑靑 (추란혜청청·가을 난초 짙푸르니)

綠葉兮紫莖 (녹엽혜자경·초록 잎과 자줏빛 줄기 돋보이고)

滿當兮美人 (만당혜미인·아름다운 사람들 가득한데)

忽獨與余兮目成 (홀독여여혜목성·문득 홀로 나와 눈이 마주쳤네)

入不言兮出不辭 (입불언혜출불사·들어올 때 말이 없고 나갈 때 인사 없으니)

乘回風兮載雲旗 (승회풍혜재운기·바람 타고 구름 깃발 실었더라)

悲莫悲兮生別離 (비막비혜생별리·슬프고도 슬픈 것은 살아 이별하는 것이고)

樂莫樂兮新相知 (악막악혜신상지·기쁘고도 기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네)


▲ 김진태 전 검찰청장
이 시는 일종의 무가(巫歌)이다. 영매인 무(巫)가 소사명 신을 불러내어 초혼(招魂)을 하는 과정을 마치 남녀가 연애하는 것처럼 노래하고 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문득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말이 없고 인사가 없다. 곧 떠나야 할 운명이다. 이별만큼 슬픈 것이 있겠는가. 사랑만큼 기쁜 것이 있겠는가. 내용도 노래도 모두 아름답다.

‘이소(離騷)’로 잘 알려진 굴원은 중국 최초의 서정시인이자 자유사상가로서 ‘초사(楚辭)’의 대표 시인이다.


굴원은 진(秦), 초(楚), 제(齊) 세 나라가 자웅을 겨루던 시기에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세에 좌도라는 중책을 맡았지만 상관대부와 충돌함으로써 왕과 멀어졌다. 이후 ‘이소’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왕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제나라와 동맹하여 진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왕은 오히려 제나라와 단절하고 진나라에 붙었다가 기망을 당하여 목숨까지 잃게 되었고 나라 역시 급격하게 기울었다.

굴원은 초나라가 진나라에 망하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니 안타까움 따위는 갖지 않으리(知死不可讓 愿勿愛兮)”라고 노래하고는 음력 5월 5일 멱라강에 몸을 던졌다. 그가 추구했던 삶과 예술, 정치에는 티끌 하나 용납할 수 없는 결백증적 자의식이 있었던데다가 이상 정치에 대한 집요함 때문에 순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사기’는 그를 “혼탁한 세상에서 빠져나오듯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다 간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정통 유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지나치게 자신의 재주를 드러냈고 울분을 내면적으로 소화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용(中庸)의 덕이 부족하단다.

중국에는 신(神)이 많다. 인간의 목숨을 관장하는 신이 사명(司命)인데 대사명(大司命)은 성인을, 소사명(小司命)은 아이의 생사를 주관한다고 한다. 이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모든 기록을 관리하여 죄에 따라 수명을 삭감한다고 하니 대단히 합리적인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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