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9일 구미 삼성전자 운동장. 흐린 날씨 속에 2천여 명의 직원들이 사업부별로 줄지어 서 있다. 머리에 ‘품질 확보’라 쓰인 띠를 두른 직원들의 표정엔 비장함마저 감돈다. 운동장 앞에는 ‘품질은 나의 인격이자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그 앞에 임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철제 의자에 앉아 있다. 현장근로자 10여 명이 해머를 들고 섰다. 그들의 앞에는 애니콜 휴대전화와 키폰, 팩시밀리 등 모두 15만대의 삼성 제품들이 산더미를 이뤘다. 돈으로 따지면 무려 500억 원 어치다. 행사 진행자의 구호에 따라 해머질이 시작됐다. 제품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제품들은 다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내 던져졌다. 직원들이 손수 만든 제품들이 부서져 불길 속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삼성 신화의 상징적인 일화인 ‘불량제품 화형식’장면이다. 이건희 회장의 품질경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휴대전화를 반도체에 이어 삼성의 미래산업으로 여겼던 이 회장은 “통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 “제품을 모조리 회수해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라”고 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삼성은 품질지수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품질 개선 드라이브를 걸었다.

20년쯤 전에 있었던 삼성의 ‘불량제품 화형식’을 지금 다시 떠올리는 것은 최근 삼성의 ‘갤럭시노트 7’의 발화로 리콜, 교환에서 단종선언까지 이어지는 심각한 품질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으로 입은 손실이 ‘7조원+α ’에 달할 것이라 한다. 올 3분기와 내년 2분기 판매 수익 등까지 합치면 손실 규모는 최대 8조 원 수준에 이를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등기이사로서 본격적인 책임경영에 나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실용주의 경영’을 내세우고 있다. 경직된 관료주의 시스템을 바꾸고 실리콘밸리 문화 이식을 시도하고 있는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3류 의식에 빠져 있던 임직원들에게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했던 이건희 회장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시점이다. 삼성을 ‘시스템이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했지만 시스템에 이상신호가 왔다. 지금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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