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네는 러시아군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지 끌려가고 있었다. 순이 아버지가 농토를 찾아서 고국을 떠나 이곳에 왔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뼈라도 찾기 위해 이렇게 된 것이다. 시베리아의 모진 바람은 이따금 눈보라와 함께 이 가엾은 ‘꺼래이’들에게 불어닥친다. 꺼래이란 말은 러시아말로 고려인, 즉 한국인이란 말이다. 이윽고 그들은 배에 실렸다. 물방울이 튀어 젖은 옷은 얼어붙어 이제는 감각마저 마비된 추위-일행 중에 낀 사람들이 중국 쿠리의 이불을 뒤집어 쓰려는 것을 다른 젊은이가 빼앗아 순이 할아버지를 덮어 주자 쿠리는 목놓아 운다.” 항일여성운동가 백신애가 1933년 ‘신여성’에 발표한 단편소설 ‘꺼래이’의 한 부분이다.

여류 소설가 백신애는 경북 영천 출신이다. 본명은 무잠(武岑)이다. 그의 강직한 성품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어릴 때 한문공부를 했다. 영천과 자인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사임, 여성동우회·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백신애는 이 무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왔다. 1929년 박계화라는 필명으로 ‘나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일간지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과에 다닌 신여성 백신애는 1932년 귀국해 결혼 했지만 이내 이혼한다.

지역의 항일여성운동가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그는 1933년께부터 창작에 전념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러시아 국경을 넘나드는 한국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꺼래이’와 가난한 두 며느리의 애환을 그린 ‘적빈(赤貧)’이 대표작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한국 여성소설의 문화·사회적 가치를 확장한 인물이다. 그는 소설을 통해 역사의식과 사회의식, 연대감을 고취함으로써 치열한 삶의 희망을 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북도가 지난 18일 백신애의 고향 영천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백과사전에 “1938년 중국 상해로 여행가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위장병의 악화로 작고했다”로 끝나는 짧은 약력으론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되새기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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