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김동완 자유기고가
가을이 길가 사과밭에 내려와 붉게 영글은 사과알이 탐스럽다. 사과밭이 양편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가면 장육사가 나온다.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절이다. 청간정은 장육사 가는 길에 있다. 장육사로 가는 도중에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 세 동이 눈길을 끄는데 이곳이 경북도 유형문화재 ‘화수루 일곽’이다.
화수루와 까치구멍집, 그리고 청간정을 묶어 문화재로 지정했다. 화수루는 충순위 권희원(權希彦)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기록에 화수루는 권희언의 분전루(墳前樓)라고 나온다. 산소에 달린 누각이라는 뜻이다. 권희언의 다섯 아들이 지었다고 한다. 1676년 건립됐다가 불에 탄 뒤 1693년 다시 지어졌다. 누마루와 몸채가 있는데 건물 전체는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빙 둘러싼 가운데에 작은 마당이 있다. 누마루 가운데는 마루, 양쪽 가장자리에는 방이 있다. 마루에서는 문중회의 제사 관련 일, 제사 지낸 뒤 음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까치구멍집은 화수루 관리동인 셈이다. 외양간과 마루 부엌 안방 사람방이 있다. 방안에서 나오는 냄새와 먼지, 부엌의 그을음 등의 실내 환기를 위해 지붕박공면에 구멍을 뚫었는데 그 모양이 까치구멍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까치구멍집은 강원도 남부와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가옥형태다.
권책은 집현전 부제학 권자홍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고모가 문종비인 현덕왕후이니 단종은 그와 외사촌이다. 숙부인 권자신과 두 형 권저와 권서가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모두 죽었다. 그때 권책의 나이가 13살이었다. 가문이 쑥대밭이 되고 나이 어려 목숨을 건진 그는 영해로 유배를 왔다. 영해에서 그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두 형님의 죽음을 애통해했다고 한다.
그후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복위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단종이 죽자 집 뒷산에 올라 왕바위를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인량리 뒷산에는 큰바위를 향해 여섯 신하가 엎드려 읍하는 듯하는 작은 바위 여섯 개가 있어 이를 왕바위라 한다. 그는 왕바위를 안고 ‘분하여 절규하니 하늘과 땅이 노하고 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퍼한다’라는 시를 남겼다.
권책의 증손이었던 권희언도 은일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인으로 폐하됐던 단종이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다시 단종으로 복위 되기 까지 250년동안 권책의 후손들은 금고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던 권희원은 선조의 뜻을 받들어 책을 읽고 교민정화에 일생을 바쳐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자 대봉서원을 세우고 사육신과 함께 배향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화수루와 청간정만 남아 있다.
청간정 앞을 흐르는 개울은 옥천이라고도 하고 갈천이라고도 한다. 이 둘을 합쳐 아예 옥갈천이라고도 한다. 김세락이 쓴 ‘청간정 중수기’는 이곳이 수석이 아름답고 빼어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산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비스듬히 남쪽을 거쳐 동쪽으로 꺾어 들다가 다시 동쪽에서 서북쪽으로 꺾어 남쪽으로 들어온다. 거의 무이산의 아홉굽이 계곡경치처럼 아름답다”
청간정 앞은 920번 지방도로가 나 있고 도로 너머에 갈천이 흐른다. 개울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예전부터 개울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렸는지, 정자를 지을 당시에는 개울이 내려 보였는데 세월이 흘러 그렇게 됐는지는 알수 없다. 어쨌거나 정자 안에 서 있자니 물소리를 맑고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래서 ‘청간’의 의미를 생각했다. 산골짜기 물흐르는 소리는 새소리보다 더 투명하고 아름답다. 그런 생각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닐까.
청간정에는 기문과 시판 6개가 걸려있다. 조상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추모의 뜻을 담은 시다.
아끼어 숨겨둔 신비한 천년의 땅에
높은 정자가 물가에 있네
언덕 옆에서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생각하며
누에 오르니 세월이 더디다
강산은 원래 주인이 있으니
당을 지은 것을 누가 잊겠는가
우리 집안에 소중하게 전해오니
샘은 오래가고 돌은 옮지지 아니하네
- 권만전의 시-